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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군인들이 지난 2월8일(현지시간) 가자지구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구(UNRWA) 본부 앞에서 군사 작전을 벌이고 있다. AP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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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가자지구 주민들의 ‘생명줄’로 불렸던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구(UNRWA·운르와)의 활동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는 유엔 회원국이 유엔 산하 기관을 ‘테러 조직’으로 규정해 금지한 초유의 사례로, 가뜩이나 위태로운 가자지구 내 구호 상황이 더욱 악화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이스라엘 크네세트(의회)는 28일(현지시간) 운르와의 이스라엘 내 활동을 금지하고 이 기구를 테러 조직으로 규정해 이스라엘 정부 및 단체와의 접촉을 금지하는 내용의 법안 2개를 각각 찬성 92표·반대 10표, 찬성 87표·반대 9표의 압도적 표차로 통과시켰다. 운르와의 ‘하마스 연계설’을 거듭 주장하며 아예 법적으로 이들의 활동을 틀어막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완전히 포위하고 요르단강 서안지구와 동예루살렘을 불법 점령 중인 상황에서 이 법안은 사실상 운르와를 통한 구호품 이송을 끊겠다는 의미다. 미 CNN은 “이스라엘 점령하에 살고 있는 수백만명의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조치”라고 짚었다.
운르와는 유엔 등 국제사회가 보낸 구호품을 이송·배급하고 의료 서비스와 피란민 대피처를 제공하는 등 가자지구 내 모든 구호 활동의 중추 역할을 해왔다. 이스라엘군의 가자지구 봉쇄로 이곳 인구 230만명 가운데 200만명 이상이 운르와의 구호 활동에 의존해 생활하고 있으며, 이번 전쟁으로 집을 잃은 피란민 100만명 이상이 운르와의 학교 등 피란시설을 이용하고 있다.
유엔 회원국의 ‘유엔기구 금지법’…“위험한 선례될 것”
전문가들은 유엔 회원국이 유엔 기구의 활동을 법률로 금지한 ‘초유의 사례’라고 지적했다. 모하마드 바지 뉴욕대 연구원은 알자지라에 “운르와는 지난 수십년간 이스라엘의 표적이 되어왔고, 이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땅에서 운르와를 본격적으로 해체하려는 것”이라며 “이는 유엔 기구에 대한 유엔 회원국의 전례 없는 금지 조치”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스라엘의 이런 시도가 허용된다면 다른 국가들도 유엔 기구를 표적으로 삼고 국제법을 대놓고 위반할 수 있는 끔찍한 전례가 될 수 있다”고 짚었다.
렉스 타켄버그 운르와 전 법률 고문은 “이스라엘이 유엔 시스템 전체에 가하는 입법 공격”이라며 “이스라엘이 국제인도법에 따른 운르와의 구호 활동을 막는다면 가자 주민들에게 이스라엘이 직접 해당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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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7일(현지시간) 가자지구 중부 누세이라트 난민촌에 있는 운르와 운영 학교에서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다친 어린이가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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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팔레스타인에 운르와를 대체할 조직은 없으며, 이미 재앙적인 상황에 놓여있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더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필립 라자리니 운르와 사무총장은 이스라엘의 이번 조치가 “유엔 헌장에 반하고 이스라엘의 국제법상 의무를 위반하는 위험한 선례를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국제사회도 가뜩이나 위태로운 가자지구 상황이 더욱 악화할 수 있다며 법안에 반대해 왔다. 전날 한국과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캐나다, 호주 등 7개국은 공동 성명을 내고 운르와의 활동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스라엘의 맹방 미국 역시 투표 전 운르와가 “가자지구에서 대체할 수 없는 역할을 하고 있다”며 법안을 통과시키지 말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이날 “이스라엘을 겨냥한 테러 활동에 연루된 운르와 직원들은 책임을 져야 한다”며 법안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그는 법안은 90일 뒤 발효되며 가자지구 민간인들에게 인도적 지원이 계속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으나, 누가 운르와의 역할을 대신할 것인지에 대해선 밝히지 않았다. 미 국무부의 관계자는 CNN에 “구호에 공백이 생기면 이스라엘이 그 공백을 메워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운르와는 왜 이스라엘 ‘눈엣가시’가 되었나
운르와는 이번 전쟁 발발 이전부터 이스라엘의 오랜 ‘눈엣가시’였다. 운르와는 1948년 이스라엘 건국으로 살던 곳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난민 70만명에게 인도적 지원을 하기 위해 이듬해 설립됐다. 이후 75년간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등지에 흩어진 팔레스타인 난민과 그들의 후손 600만명을 돕기 위한 구호 활동을 해왔다.
운르와는 3만2000여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으며, 다른 유엔 조직과 달리 구호 종사자 대부분이 현지 팔레스타인인이다. 특히 가자지구에 직원 1만3000여명을 두고 있어 이곳에서 가장 큰 고용을 창출하는 조직이기도 하다. 유엔 난민 관련 조직들 중 팔레스타인인이라는 특정 난민만을 지원하는 유일한 기구이며, 직원의 97%를 차지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은 다른 유엔 직원보다 훨씬 적은 임금을 받고 외교 여권도 받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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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6일(현지시간) 가자지구 중부 누세이라트 난민촌에서 피란민 대피소로 쓰이던 운르와 운영 학교가 이스라엘군의 공습을 받아 파손돼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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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운르와가 유엔의 외피를 쓴 사실상 ‘팔레스타인 단체’이며, 중동 각국에 흩어진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정착을 방해하고 반유대주의를 조장한다고 주장해 왔다.
이번 전쟁을 둘러싸고 번번이 유엔과 대립각을 세워온 이스라엘은 전쟁 4개월 차에 접어든 지난 1월 말 운르와 직원 12명이 지난해 10월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에 가담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스라엘의 발표 4일 만에 미국 등 서방 18개국이 재정 지원을 끊으며 운르와는 말 그대로 ‘고사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유엔은 즉각 해당 직원들을 해고하고 독립적인 조사를 시작했으나, 이후 이스라엘은 한 발 더 나아가 운르와 직원 중 12%에 달하는 1500여명이 하마스와 연계돼 있다고 주장하며 파문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후 수개월이 흐르도록 이를 뒷받침할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미국 정보기관조차도 이스라엘의 주장을 확인할 수 없으며 사실을 왜곡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잠정 결론을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미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들이 재정 지원을 재개했다.
이스라엘은 운르와의 ‘하마스 연루설’이라는 여론전과 함께 운르와가 운영하는 학교를 연달아 공격하는 한편 법률로 이들의 활동을 금지하는 방안 역시 추진했다. 법안을 공동 발의한 리쿠드당 의원 보아즈 비스무트는 이날 “운르와는 난민 지원 기관이 아니라 하마스 지원 기관”이라고 주장했다.
이스라엘은 이날도 가자지구 북부에서 운르와가 피란민 대피처로 운영해온 알파쿠라 학교에 불을 지르고 주변을 폭격했다. 이스라엘군은 지난 8월에만 총 16차례 가자지구 전역에서 운르와가 운영하는 학교를 표적 공습했다. 이 학교들 모두 전쟁 중 갈 곳을 잃은 피란민들의 대피소로 쓰이고 있었다.
지난해 전쟁 발발 후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사망한 운르와 직원은 233명에 달한다.
☞ 피란민 몰려든 유엔 학교는 왜 이스라엘의 ‘표적’이 되었나
https://www.khan.co.kr/world/mideast-africa/article/202409141622001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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