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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토)

‘세상이 무너진’ 2년…이태원 유가족은 오늘도 묻는다, 그날의 진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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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 2주기 맞아 유가족 구술집 <참사는 골목에 머물지 않는다> 펴내

“유가족들은 서로가 세상 밖으로 나가는 끈”…기억과 진상규명 기대

경향신문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법에서 김광호 전 서울경찰청장의 이태원 참사 부실 대응 관련 1심 선고에 대해 무죄 판결이 내려진 지난 10월 17일 이태원 참사 유가족이 서로 위로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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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두 해 전 가을 이맘때, 단풍의 색은 어땠던가. 2022년 10월 29일 김채선씨는 친구들과 속리산으로 단풍을 보러 갔다. 같은 날 딸 김지현씨는 이태원 참사로 세상을 떠났다. 김채선씨는 “딸이 유명을 달리한 날에 엄마가 (단풍을 보고) 그렇게 행복해”한 것에 대해 “자신이 너무 혐오스러워” 그날을 기억에서 영원히 삭제하고 싶다고 말한다. 단풍색 점퍼는 모두 버렸고 그의 삶의 색도 바뀌었다. 그는 영안실에 누워 있는 딸을 보고 ‘인정할 수 없다’고, ‘문만 열만 원래대로 돌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그는 그 순간 자신이 딸을 안아주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마지막이었는데 왜? 왜 우리 딸을 안아주지 않았을까요? 지금까지도 저 자신이 원망스럽고 딸에게 미안해요.”

참사 이후 경찰서에서 온 서류엔 ‘죄명’과 ‘변사’라는 표현이 쓰여 있었다. ‘의미 없는 행정적인 절차일 뿐’이라는 경찰의 말에 김채선씨는 저항했다. 그 표현을 지우고 ‘압사’라고 쓰인 서류를 받아냈다. 뿌듯했지만 허탈했다. 딸은 없는데 종이 한 장만 남아서.

“참사를 당한 후 유가족으로서 가슴 아픈 일이 셀 수 없이 많았어요. 그 과정에서 세상을 보는 눈이 저절로 바뀌었어요. (중략) 참사가 일어나고 진상규명 투쟁을 하면서 국가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됐어요. 2주기가 돼가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정부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요. 결국 제가 붙잡을 것은 지치지 않고 끝까지 싸워나가야겠다는 우리 유가족의 의지뿐이었어요.”

이태원 참사 2주기를 맞아 나온 유가족 구술집 <참사는 골목에 머물지 않는다>(창비)를 통해 김채선씨는 이 같은 자기 안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 책은 작가와 활동가들이 결성한 ‘10·29 이태원 참사 작가기록단’이 25명의 유가족을 직접 만나 인터뷰하고 동행 취재한 기록이다. 이태원 참사로 자녀를 잃은 부모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서울에서 유가족 활동의 전면에 나선 이들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지역에서, 해외에서 아무런 소식을 들을 길이 없어 고립감을 느낀 유가족들의 이야기도 전한다.

경향신문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이 참여한 구술집 <참사는 골목에 머물지 않는다> 표지. 창비


■“왜 참사가 일어났는지 알아야 한다”

이태원 참사 당일 친구를 만나러 나간 서수빈씨는 밤 11시가 다 돼가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전화도 받지 않았다. 다음날 새벽 3시쯤 돼서야 전화 연결이 됐는데 용산경찰서였다. 수빈씨 부모는 경찰 안내에 따라 한남동주민센터에 가서 실종신고를 했다. 주민센터에선 사망자 명단이 전해졌다. 딸의 이름이 없길 바라고 또 바랐다. 오후 2시쯤 딸이 사망했으며 경기도 성남의 한 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성남 병원에서 일산 장례식장까지 상조회사에서 불러준 차로 가는데, 차 안에 타보니 우리 딸이 붕대 같은 거로 감겨서 있는 거예요. 너무 끔찍해… 그 상황이…. 차 안에 있는 40분 동안 우리 딸을 계속 안고 왔어요. 다행이다. 그래도 우리 딸 40분은 안을 수 있어서 너무 다행이다….”(<참사는 골목에 머물지 않는다>·‘서수빈씨 어머니 박태월씨 이야기’)

박태월씨는 딸이 어떻게 성남의 병원까지 가게 됐는지 알고 싶다. 왜 그 새벽부터 오후 2시까지, 긴 시간 주민센터에서 공포에 떨어야 했는지 책임 있는 누군가 설명해주길 바란다. <참사는 골목에 머물지 않는다>에는 이태원 참사 당일부터 희생자의 시신을 인계받고 장례를 치르는 동안, 유가족이 당국으로부터 어떤 설명을 듣지 못했다는 증언이 기록돼 있다. 유가족들이 가족과 죽음과 관련한 단서들, 이를테면 구급일지와 같은 ‘서류 한 장’을 받기 위해서도 소방서에, 병원에, 경찰서에, 행정안전부에 일일이 전화를 걸고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스스로 알아낼 수밖에 없었다고 밝힌다.

이태원 참사로 159명이 숨지고 195명이 다쳤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진 대형 참사였다. 유가족들은 국가가 왜 참사를 예방하지 못했으며, 참사 이후 대응은 왜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는지 진상이 규명돼야 한다고 본다. 또 책임자가 마땅한 책임을 지는 것을 원한다. 유가족들은 ‘알고 싶다’는 마음으로 2년을 투쟁했다. 경찰과 국회는 그 답을 내놓지 못했다.

경찰은 2022년 11월 1일 특별수사본부(특수본)를 꾸려 74일간 수사를 진행했다. 특수본은 이태원 참사를 ‘책임 있는 기관들의 무책임한 대응에 따른 인재’로 결론 내리고 23명(이임재 전 용산경찰서장, 박희영 용산구청장 등 6명 구속, 김광호 전 서울경찰청장 등 17명 불구속 입건)을 입건했다. 그러나 행정안전부 장관, 서울시장, 경찰청장 등은 수사하지 않았다. 국회는 그해 11월 24일부터 45일간 국정조사를 실시했다. 국민의힘의 불참으로 예산안 처리가 늦어져 12월 19일에야 첫 회의가 야당 단독으로 열렸다. 국정조사에 피해자가 참여한 것은 국정조사 활동 종료 5일 전이었다.

유가족이 기댈 것은 ‘특별법’이었다. 2023년 4월 야당이 ‘10·29 이태원 참사 피해자 권리보장과 진상규명 및 재발 방지를 위한 특별법안’(특별법)을 공동발의했다. 유가족들은 2023년 6월 특별법이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서 통과되기를 바라며 국회 앞에서 농성을 벌였다. 159㎞에 달하는, 뜨거운 아스팔트를 걸으며 행진했다. 그해 12월과 올해 1월에는 특별법 입법을 촉구하며 혹한 속에서 오체투지를 했다. 2024년 1월 9일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 문턱을 넘었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은 1월 30일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했다.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을 때) 그때만 해도 기대라는 게 있었어요. 이제 알 거야, 알 거야. 우리 딸 그날 몇 시에 어떻게 돼서 병원에 갔는지. 그런데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 버렸잖아요. 허탈하다 그럴까, 무기력이 와버리더라고요. 제가 무너져버린 느낌이 들었어요.”(‘서수빈씨 어머니 박태월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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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유가족·시민·4대 종교인 100여명이 지난 1월 29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에서 대통령실 앞까지 이태원 참사 특별법 공포를 촉구하는 오체투지를 하고 있다. 다음날인 1월 30일 윤석열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이태원 특별법 거부권을 행사했다. 정효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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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1일 여야가 특별법 수정안에 합의하고 다음날 수정된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특별법에 따라 지난 9월 13일 ‘10·29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한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 위원들이 임명됐고, 같은 달 23일부터 본격 활동을 시작했다.

이정민 유가족협의회 대표는 지난 10월 22일 서울 중구 이태원 참사 기억소통공간 ‘별들의 집’에서 열린 <참사는 골목에 머물지 않는다>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지난 1년 6개월 동안 길거리에서 몸을 던지면서 특조위 만들어야 한다고 외쳤던 이유는 항상 대한민국 역사를 돌이켜보면 끊임없이 재난 참사가 발생하는데 그 책임은 묻혀 버리는 현상이 반복됐기 때문”이라며 “특조위가 없다면, 재판으로 책임자가 무죄라고 하면 아무런 책임이 없는 상태로 가기 때문에, 특조위가 너무나 소중하다”고 했다.

최근 재판 결과 앞에서 유가족들은 눈물을 흘렸다. 지난 9월 30일 열린 1심에서 업무상과실치상 혐의로 기소된 이임재 전 서울용산경찰서장(금고 3년) 등 용산경찰서 관계자 3명에게 유죄가 선고됐다. 반면 박희영 용산구청장과 구청 관계자 5명은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어 지난 10월 17일 김광호 전 서울경찰청장 등 경찰청 관계자 3명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검찰이 항소해 이들의 책임은 2심에서 더 다툴 예정이다.

■“‘유가족’이라는 이름으로···이런 참사 없는 사회로”

정부는 참사 이후 유가족들이 서로 연락할 방법도 안내해주지 않았다. 유가족들은 장례식장에서, 납골당에서 서로가 유가족임을 알게 됐다고 전한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에서 연 유가족 모임에서 더 많은 유가족이 연결됐다. 2022년 12월 10일 유가족협의회가 출범했다. 유가족들은 참사 100일이 되던 2023년 2월 4일 지하철 6호선 녹사평역에 있던 분향소를 서울 시청광장으로 옮긴다. 경찰이 광화문광장을 막고 있었기에 시청광장으로 방향을 틀었는데, 유가족들과 그 곁에서 시민들이 도와 경찰을 막아내고 분향소를 설치할 수 있었다.

“우리와 영정을 따라오던 그 많은 시민의 힘을 목격했어요. ‘연대의 힘이 이렇게 크구나’라는 걸 처음으로 느꼈어요.”(‘이주영씨 아버지 이정민씨 이야기’)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한 후 유가족들은 2024년 6월 16일 시청 분향소를 정리하고 10·29 이태원 참사 기억소통공간 ‘별들의 집’으로 희생자들의 영정을 이전했다. ‘분향소’는 세상을 떠난 자녀를 만날 수 있는 공간이자, 유가족들이 서로에게 의지해 시간을 견뎌낼 수 있는 공간이 됐다. 시민들이 찾아와 위로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혐오의 말들도 분향소를 찾아왔다.

“슬픔을 상품화해 버리고 유가족들을 매도하는 그런 사람들을 마주할 때면 삶이 너무 팍팍하게 느껴집니다. 보수와 진보로 나뉘는 거, 물론 생각의 차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이건 슬픔이잖아요. 아이를, 남편을, 형제를, 친구를 잃은 슬픔. 그런데 돈을 밝힌다든지, 심지어 간첩이 조종했다는 말도 들었어요. 분향소에 나와 지킴이 하고 있으면 지나가면서 그런 말을 해요. 왜 그러겠어요.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으니까요. 행정안전부 장관이나 용산구청장, 경찰청장 등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안일하게 사태를 수습했고 지금까지도 책임지지 않고 있죠. 분위기 탓을 하고 핼러윈 축제 탓을 하고 거기 모여든 사람들 탓을 하고 있어요.”(‘송은지씨 아버지 송후봉씨 이야기’)

“저는 ‘놀러 가서 죽었다’는 말이 너무 화가 나요. 놀러 갔으면 길에서 그렇게 죽어도 되는 건가요? 우리 모두 일상에서 놀러 가잖아요. 꽃놀이도 가고 유원지에도 놀러 가잖아요. 놀러 가서 죽었다는 건 상황을 왜곡하는 말일 뿐이에요.”(‘김산하씨 어머니 신지현씨 이야기’)

참사 이후 “세상이 무너진” 유가족들은 서로서로 ‘세상 밖으로 나가는 끈’이라고 말한다. 이태원 참사에서 친구를 잃은 고등학생 이재현군은 2022년 12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송해진씨는 ‘유가족의 자격’에 대해 자문했다고 한다. 그는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유가족이 된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정말 새로운 세상에 내던져진 기분이더라고요. 재현이가 참사 당시 살아서 왔었기 때문에 그때 그 아이의 심정이 어떨지 이해하고 싶었지만 못했습니다. 아이를 떠나보내고 나니까 그때 아이의 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낯선 세상에 혼자 떨어져 있고, 고립돼 있고, 일상을 살아가는 힘이나 이유를 찾기 많이 힘들긴 하더라고요. 막연한 공포, 두려운 심정들로 지난 1년여를 살아왔던 거 같은데 그런데도 이 시간을 버텨올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옆에 항상 계신 유가족, 활동가분들, 작가기록단 여러분들이 있어서 이 자리에 온 것 같아요.”

유가족들은 참사 2주기를 앞두고 올 10월 한 달 내내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더 많은 시민이 참사를 기억하고 진상규명을 위해 연대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만, 그보다 “바빠야만 이 10월을 버틸 수 있기 때문”(이정민 대표)이다.

<참사는 골목에 머물지 않는다>는 이태원 참사를 통해 한국사회가 무엇을 배워, 무엇을 고쳐, 어떤 사회로 나아가야 하는지 그 답을 찾기 위한 질문들이 들어 있다.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연대하는 게 우리 유가족의 의무가 된 것 같아요. 이런 참사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다시는 우리처럼 자식을 잃은 부모가 안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죠.”(‘오지연씨 아버지 오영교씨 이야기’)

신지현씨는 기자간담회에서 구술집에 참여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고 딸은 ‘억울해’라고 말은 못 하지만 저는 억울합니다. 요즘 주변에서 지인들한테서 청첩장이 날아오는데, 우리 딸 결혼식을 볼 수 없고 남자친구 얘기도 들을 수 없고…. 너무 많이 부럽고, 너무 많이 아픕니다. 구술집 참여는 그냥 제가 해야 할 것 같았어요. 누가 말하지 않으면,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너희들이 밟으면 내가 꿈틀거리고 있다는 걸 분명하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감춰지는 게 무서워서, 묻혀버릴까 봐 무서워서 계속 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김향미 기자 sokh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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