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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3 (수)

[단독]“유교-전쟁 경험, 작품 공감 이끌어”…베트남도 한강 ‘열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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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채식주의자’ 베트남어로 번역한 황하이번

“채식주의자는 질문을 던지는 작품입니다. 답변을 찾고자 계속 집착하게 됩니다.”

한강의 소설집 ‘채식주의자’(2007년)를 베트남어로 번역한 황하이번(46)은 20일 동아일보와 통화에서 이같이 말했다. 황 번역가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채식주의자를 번역했다. 채식주의자는 2010년 베트남에서 출간되며 처음으로 해외 독자들과 만났다.

황 번역가가 채식주의자를 접한 계기는 2005년 이상문학상 수상집이었다. 당시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석사 과정을 밟고 있던 황 번역가가 대상을 수상한 한강의 중편 ‘몽고반점’을 읽은 것. 몽고반점은 육식을 거부하는 여성 ‘영혜’의 형부인 비디오 아티스트 ‘나’가 화자로 나온다. 그가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남아있다는 처제 영혜를 모델로 세우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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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소설집 ‘채식주의자’를 베트남어로 옮긴 번역가 황하이번. 본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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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반점이 발표되고 2년 뒤, 영혜를 주인공으로 한 연작을 엮어 채식주의자가 출간됐다. 자신의 직감을 따른 황 번역가는 누구보다 빨리 번역서를 내놨다.

“몽고반점은 미학적이고 아름다운 작품이었어요. 인물의 감정에 고스란히 빠져들었어요. ‘아, 이건 예술이다’라는 인상을 받았고,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더라고요. 그래서 채식주의자가 나오자마자 번역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해외 문단의 평가가 나오기 전이었지만, 좋은 작품이라는 확신이 있었죠. 그만큼 제가 사랑한 작품입니다.”

번역 작업 중 한강과 만나는 기회도 생겼다. 2009년 한국문학번역원 주최 번역가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한 것. 당시 호치민국립대 한국학부에서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던 그는 한달 반 동안 레지던시 참여를 위해 한국을 찾았다. 그는 “작가님과 떠난 문학기행은 소중한 경험이었다. 궁금한 점을 직접 여쭤봤고, 이후에도 이메일로 소통하면서 작업했다”고 했다.

황 번역가가 채식주의자를 작업한 지도 벌써 15년이나 흘렀다. 그는 문장이 어렵지는 않던 작품이었다고 설명했다. 다만 소설의 관능적이고 신비롭고 모호한 분위기를 독자들에게 잘 전달하기 위해 신경 썼다고 했다. 그는 “번역을 마치고도 여러 해가 지나서야 작품의 의미를 이해한 것 같다”고 했다.

▶관련 기사: 채식주의자 출간 직후(2007년) 소설가 한강 인터뷰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071102/8507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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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번역가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석하러 한국을 찾은 서른한살 황 번역가의 모습. 한강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본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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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번역가는 1세대 베트남어 번역가다. 1992년 양국 수교 이듬해에 베트남에 한국학과가 설치됐다. 그리고 1996년 하노이국립대에 입학한 황 번역가는 한국어 전공을 선택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싶었어요. 한-베 사전이 없어 한-영 사전과 영-베 사전을 끼고 공부했습니다. 어렵게 공부했지만 재밌었어요. 대학 4학년 때는 배우 김혜수, 배용준 주연 44부작 드라마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의 베트남어 번역에도 같이 참가했죠.”

한국 드라마가 큰 사랑을 받는 베트남이지만, 한국 문학은 여전히 낯설었다. 그러나 2016년 한강의 맨부커상을 받으며 분위기가 바뀌었다. 노벨 문학상까지 받자, 베트남에 출간된 한강 작품 세권(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흰)은 모두 동난 상태다. 황 번역가는 “가부장제가 강한 유교 문화권이고, 전쟁의 아픔을 겪은 베트남 독자들은 누구보다 한강의 작품에 공감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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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현지 시간) 호치민국립대 한국학부가 주최한 ‘한강과 한국문학의 기적’ 세미나에서 토론자로 나선 황 번역가(왼쪽 두번째). 호치민국립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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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베트남에는 ‘한강 문학의 기적’ 열풍이 불고 있다. 한강 작품 세계와 한국 문학에 대한 관심을 넘어 “우리도 노벨 문학상을 받아보자”는 희망이 싹튼 것. 베트남은 중국, 프랑스, 미국 등 외세와 맞서며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문학을 발달시켜 온 국가다. 문학 독자층 또한 두텁다.

“베트남 주요 언론은 한국의 ‘한국 문학 세계화’ 전략을 집중 조명하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가 문학번역 지원과 번역가 육성에 물심양면 지원했고, 외국인 대상 한국어 교육에도 굉장히 많이 투자한 점에 주목한 것이죠.”

17일(현지 시간) 호치민국립대 한국학부 주최로 연 ‘한강과 한국 문학의 기적’ 세미나에는 600명 넘게 모이며 베트남 사회의 뜨거운 관심을 보여줬다. 한국 문학을 연구하는 베트남 학자들이 발표자로 나섰고 황 번역가도 ‘채식주의자 번역 및 한강 작품의 인문 가치를 찾아가는 과정’을 주제로 발표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한강 문학을 어떻게 가르치면 좋을지 질문하러 멀리서 찾아온 고등학교 문학 교사도 있었고, 한국학계와 문학계뿐 아니라 영화계 등 다양한 분야의 학생과 연구자들이 참석해 놀라웠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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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호치민국립대 한국학부가 주최한 ‘한강과 한국문학의 기적’ 세미나가 학생, 연구자, 교사 등 600명 이상이 모이며 성황리에 진행됐다. 호치민국립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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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번역가가 느끼는 한국 문학의 힘은 무엇일까.

“한국 드라마나 영화는 인물의 심리를 너무나 잘 표현합니다. 한국 문학이 영향을 줬을 것 같아요. 좋은 글을 읽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거든요. 사실 저는 현재 문학번역을 쉬고 있는데, 한강의 차기작은 꼭 번역하고 싶습니다.”

이지윤 기자 asa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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