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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4 (목)

이슈 미술의 세계

일상 속 사물로 틀을 깬 양혜규의 20년…영국서 첫 서베이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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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 헤이워드갤러리
양혜규 개인전 ‘윤년’ 선봬
1995년 이래 작업 총망라
한국 첫 개인전 재현하고
커미션 신작 3점 최초 공개
“예술 외연 끊임없이 확장”


매일경제

양혜규 ‘윤에 따른 엇갈린 랑데부’(2024). 반체제 작곡가 윤이상의 ‘이중 협주곡’(1977)을 모티브로 한 블라인드 설치 작품이다. 런던 송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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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인드와 형광등, 빨래 건조대, 행거, 싱크대….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가정 용품들이 영국 런던 한복판의 한 전시장을 가득 메웠다. 블라인드는 창문이 아닌 천장과 바닥에 있고, 싱크대는 벽면에 그림처럼 걸렸다. 블라인드로 가린 건 햇빛이 아닌 백색 전구의 빛. 뜨개실, 전통 한지 등 한국의 정취가 담긴 물건들도 곳곳에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처럼 런던을 떠들썩하게 만든 주인공은 독일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한국 작가 양혜규다. 전통과 현대를 자유롭게 오가며 친숙한 물건들을 낯설게 병치한 이곳에 서 있자니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다.

양혜규 작가의 개인전 ‘윤년(Leap Year)’이 내년 1월 5일까지 런던 헤이워드갤러리에서 열린다. 영국에서 열리는 첫 대규모 서베이 전시로, 1995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양 작가의 작품 활동 20년을 총망라하는 120여 점의 작품이 5개 전시관을 가득 채운다. 삼성문화재단의 후원을 받은 이번 전시를 위해 제작된 커미션 신작 3점도 최초로 공개된다. 또 일찍이 독일로 이주한 양 작가가 한국에서 처음 열었던 개인전 ‘사동 30번지’(2006)는 18년 만에 재현돼 다시 관객을 맞는다.

전시는 관람 동선을 따라 걷는 동안 관객들이 ‘광원 조각’ ‘중간 유형(The Intermediates)’ ‘의상 동차(Dress Vehicles)’ 등 양 작가의 대표 연작을 다채로운 형태로 경험할 수 있도록 꾸며졌다. 이번 전시 기획을 총괄한 융 마 헤이워드갤러리 수석 큐레이터는 “서베이전이지만 작품을 연대기 순으로 나열하는 대신 다양한 층위를 지닌 양혜규의 작품 세계를 잘 보여줄 수 있도록 서로 다른 시기나 매체, 주제에 대한 구분 없이 총체적으로 접근해 스토리텔링을 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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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보관할 곳이 없어 박스째 쌓아 이를 작품화한 양혜규의 ‘창고 피스’(2004). 런던 송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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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스토리는 다양한 감각을 자극하는 조각과 대형 설치, 종이 콜라주 작품으로 펼쳐지면서 이민자의 삶과 노동과 산업, 문화적 전환 같은 주제를 아우른다. 일상적인 사물을 평범하게 바라보지 않고 새롭게 재해석하며 문화적 순응을 거부해온 양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융 마는 “작품이 처음엔 지극히 개인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들여다 볼수록 사회적인 것, 정치적인 것, 신화적이고 영적인 것, 상호 연결성과 움직임의 개념을 시각화한 것으로 확장됨을 알 수 있다”며 “양 작가는 동아시아의 전통과 민속, 모더니즘, 현대 미술사와 자연 등 다양한 역사와 관습을 넘나든다”고 설명했다.

전시장 입구에서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창고 피스’(2004)는 양 작가가 런던 레지던시에 입주해 있을 당시 작품을 보관할 곳이 없었던 상황을 그대로 작품화한 것이다. 유럽 곳곳에서 열린 전시가 끝난 뒤 돌아온 조각, 설치 작품들을 박스째로 맥주 박스, 플리스틱 간이의자 등 창고의 다른 물건들과 함께 높이 쌓아 고정시킨 작품이다. 박스 안에 든 작품은 전시 기간 일주일에 하나씩 풀어 전시된다. 융 마는 “작가의 현실적인 고민을 해결함과 동시에 작가의 삶이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개념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양 작가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작가들의 창고 문제는 여전하다”고 전했다.

‘사동 30번지-런던 버전’(2024)은 양 작가가 지난 2006년 외할머니가 살던 인천 폐허에서 열었던 한국 첫 개인전 ‘사동 30번지’를 새롭게 재해석했다. 당시 무대가 됐던 폐허는 이제 인천에도, 런던에도 없지만 종이접기로 만든 물건들과 조명 기구, 케이블, 선풍기, 건조대, 스탠드 등 전시를 구성했던 작품들을 그대로 선보이면서 지나온 흔적과 변화를 조명한다. 여기에는 양 작가가 서울에서 대중교통을 타고 인천에 도착해 과거 외갓집이 있던 곳을 찾으려다 길을 헤매는 장면이 담긴 새 영상도 포함됐다. 융 마는 “‘사동 30번지’(2006)는 기존 미술 전시의 틀을 깬 전시였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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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혜규 개인전 ‘윤년’이 열리고 있는 영국 런던의 헤이워드갤러리 전시장에 대표작인 ‘중간 유형’ 연작이 전시돼 있다. 헤이워드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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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의 대미는 층층이 다양한 색상과 각도로 배치된 베네치아 블라인드로 구성된 대형 설치 작품 ‘윤에 따른 엇갈린 랑데부’(2024)가 장식했다. 분단 상황 속에서 독일로 망명한 작곡가 윤이상(1917~1995)의 ‘이중 협주곡’(1977)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윤이상의 음악과 함께 작품은 디아스포라의 아픔을 노래하는 동시에 화합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한다. 어두운 공간에서 주기적으로 블라인드를 비추는 조명은 누군가 이를 바라보며 숨을 쉬는 것 같은 효과를 냈다. 양 작가는 “음악과 빛의 조화는 처음 시도한 것”이라며 “오랫동안 정치적 인물로만 알았던 윤이상을 음악가로서 탐구했다”고 설명했다.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 촉각을 통해 체험할 수 있는 작품들도 눈길을 끈다. 신작 ‘그라데이션의 소리 나는 물방울들-워터 베일’(2024)은 ‘소리 나는 조각(Sonic Sculptures)’ 시리즈의 일환이다. 주로 동아시아권에서 열린 문의 가림막으로 흔히 사용하는 비즈 발과 유사한 형태로 얇은 체인에 은색과 파란색의 반짝이는 방울들을 달아 높이 2.7m의 발을 만들었다. 관객이 커튼을 열듯 손으로 이 발을 걷으며 통과할 때면 방울 소리가 온 공간에 울려퍼진다.

영국 최대 복합문화예술센터인 사우스뱅크센터에 1968년 개관한 헤이워드갤러리는 런던을 대표하는 현대미술 전시공간으로 브리짓 라일리, 트레이시 에민, 브루스 나우만, 아니쉬 카푸어 등 세계적으로 가장 혁신적인 현대미술 작가들의 작품 세계를 소개해왔다. 랄프 루고프 헤이워드갤러리 관장은 “양혜규는 세계에서 가장 선구적인 예술가 중 한 명으로, 놀라운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예술의 정의와 표현 방식에 대한 경계를 넓혀가는 작가”라고 호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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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의 헤이워드 갤러리에서 관람객들이 양혜규 작가의 영상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헤이워드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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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송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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