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조기종식을 공언하고 대통령 재임 시 김정은과 ‘우호적 관계’였음을 과시하며 한반도 문제 해결에 자신감을 보인다. 워싱턴의 주류세력과 트럼프의 일탈적 언행에 질린 이들은 코웃음 칠지 모르나, 꽤 많은 이들이 트럼프가 적어도 현직 부통령인 민주당 카멀라 해리스 후보보다 국제 정세를 안정화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반도에서도 해리스가 북한 문제를 내버려둔 채 한·미·일 군사동맹화에만 몰입하며 정세 악화에 한몫한 바이든의 정책을 변화시키리라고 기대하는 이는 많지 않다.
그렇다면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그가 정말 대결 상황을 멈춰 세우고 한반도 정세를 대화와 협상 방향으로 전환할 수 있을까? 단정키 어렵지만, 어느 정도 협상 국면을 열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게 한반도 정세 변화의 결정적 변수로 작용하긴 어려울 것이다.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진전은 한국 정부가 적극 나설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한반도 정세의 가장 큰 변수이다. 그러나 미국 지도자들의 북한 인식이 공화, 민주 모두 역사적 경험을 통해 누적된 강력한 불신과 트라우마로 굳어져 있어서 집권당이 바뀌어도 새로운 정부가 적극적으로 대북협상을 추진하기 어렵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미국이 북한과 적극 협상을 추진할 때는 1993~1994년 1차 북핵 위기 때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한국 정부의 설득 혹은 중재가 매개되어 있었다.
역사는 한반도 정세 변화의 추동력이 미국이 아니라 한국 정부임을 보여준다. 한반도 정세가 평화적으로 호전된 시기는 미국의 민주, 공화 중 특정 정당의 집권 시기와 상관없었다. 반면 한국에선 예외 없이 포용정책을 추진하는 정부가 들어선 때였다. 예컨대, 남북기본합의서 체결과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6·15 남북공동선언, 6개국이 북핵 해결에 합의한 9·19 공동성명 및 10·4 남북공동선언, 4·27 판문점선언과 최초의 북·미 정상회담 등 한반도 평화 증진에 이바지한 주요 사건이 있던 시기가 미국에선 공화당과 민주당 정부가 교차한 데 반해, 한국에선 포용정책을 추진한 노태우·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 때였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 정부의 평화를 향한 강력한 의지와 정책 추진이 한반도 문제 진전의 관건임을 일깨운다.
트럼프는 기성 미국 정치인들보다는 북한 지도자에 대한 고정적 편견이 덜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게다가 그는 김정은과 몇 차례 정상회담을 한 경험도 있다. 그리고 회담은 실패로 끝났지만 두 지도자 간 서로에 대한 특별한 비방이 없었다. 트럼프가 김정은과의 대화에 나설 가능성을 높이는 대목들이다.
그러나 트럼프가 김정은과 대화에 나서더라도 ‘핵 문제’를 둘러싼 이견 때문에 의미 있는 합의를 만들어낼 가능성은 작다. 미국 조야나 국민 여론을 고려할 때, 아무리 트럼프라도 북핵 문제를 빼놓고 김정은을 만나긴 어렵다. 이미 핵무기 보유를 공식화한 북한은 미국이 북핵 문제를 의제로 꺼내면 협상을 깰 것이다. 설령 만나는 조건에서 비핵화가 빠졌더라도 미국은 북핵 문제가 빠진 합의를 상상하기 어렵다. 여기에 한국 정부는 트럼프의 대화 추진에 강력한 우군이던 문재인 정부에서 거꾸로 북·미 대화에 강하게 제동을 걸 가능성이 큰 윤석열 정부로 바뀌었다.
그러나 북·미 대화가 실패로 끝나더라도 그 과정은 한반도 정세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예컨대, 북·미 대화가 진행되거나 정상회담이 성사되면 그것이 일본, 중국 등 주변 국가 모두의 대화 의지를 자극할 것이다. 윤석열 정부의 외골수 대북강경정책의 전환을 요구하는 내외의 압박도 거세질 것이다. 결국, 한반도 정세만을 따로 놓고 본다면 트럼프의 당선이 얼어붙은 한반도 정세에 대화와 협상이라는 잃었던 공간을 다시 열려는 움직임을 추동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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