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베이징특파원·대기자 |
국가수립일을 기념하는 중국 국경절 연휴(1~7일) 동안 현지인들이 가장 많이 본 영화는 한국전쟁을 다룬 천카이거 감독의 '지원군: 존망지전'이었다. 그의 한국전쟁을 다룬 '지원군' 3부작 가운데 두 번째 작품으로, 유엔군과 중공군이 강원도 철원에서 12일 동안 벌인 전투를 소재로 했다.
영화를 본 지인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었다. 그들은 '패왕별희'의 그 천카이거가 맞냐며 불만들을 쏟아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로 의지하며 패왕(항우)과 별희(항우 애인) 역으로 우뚝한 경극 스타로 성장한 두 남자가 겪는 사랑과 질투, 배신과 미움을 슬프지만 화려하게 그려냈던 그 거장이 맞냐는 반문이었다.
한 중국인 지인은 "역사적 수레바퀴 속에 광분하는 권력의 야만성과 어처구니없음, 폭력 속에서 연민의 시선으로 역사와 인간을 성찰한 영화들을 가능하게 했던 그 시대가 그립다"고 말했다. '패왕별희'는 1993년 칸영화제에서 임권택의 '서편제'를 제치고 대상인 황금종려상 등 수많은 영화제에서 각종 상을 휩쓸면서 중국 영화의 가능성과 예술성을 세계에 알렸다.
천카이거보다 두 살 많은 장이머우 감독. 1980~1990년대, 사회성과 예술성 높은 작품들을 만들던 그도 더 이상 사회와 개인의 균열이나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는 문제 제기를 하지 않는다. '귀주 이야기' '국두' '홍등' 등으로 중국 영화의 황금시대를 선도한 그는 '붉은 수수밭'으로 원작자 모옌을 세계에 알려, 그가 노벨상 수상자가 되는 데도 역할을 했다.
그러던 그는 영화 '영웅'으로 '전향'을 알렸다. 최초 통일제국을 이뤄낸 진시황을 통합과 안정의 아이콘으로 미화하는 메시지를 담았다. 인상적인 영상미에도 불구하고 당시 관객들은 냉소적이었다. 그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막식 총감독을 맡았고, 거대 연출 프로그램을 잇따라 수주했다. 다양한 가치보다 성장 효율과 성장 지상주의에 투항했다.
2000년대를 거치며 중국은 애국주의 열풍 속에서 국가주의와 권위주의 속으로 회귀했다. 집단과 중국 특색이 강조되고 제약이 늘면서 개인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베이징올림픽 주경기장 기본설계를 맡았던 아이웨이웨이 같은 예술가들은 고국을 떠나야 했다.
그 속에서도 중국은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뤄나갔고 알리바바나 화웨이, 텐센트, 비야디(BYD) 등 대기업들은 더 세게 지구촌을 흔들어대고 있다. 지난 8월 출시된 콘솔게임 '검은신화: 오공'은 전통에 기반해 창의력과 기술력을 결합시킨 중국 특색의 게임이란 찬사 속에 판매기록을 세웠다. '우리식 문화산업'도 가능하다는 자신감이 더 커졌다.
중국인 지인에게 "왜 한국 드라마와 영화를 좋아하냐"고 물었더니 "들뜨고 설레게 하고, 새로운 느낌을 주고 기대하게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중국 드라마에서는 볼 수 없는 재벌과 정치, 적나라한 사회문제와 갈등을 엿볼 수 있고, 개인을 찾을 수 있었다"는 대답이었다.
소재와 표현에 제약이 없고, 성역 없이 뜨거운 이슈를 자유롭게 다룬다는 점이 한류가 힘을 갖는 이유였다. 국가와 집단, 통합과 조화를 앞세우며 중국 특색을 강조하는 상황에서 많은 중국인들은 한류에서 분출구를 찾으려 했다.
지난주 노벨 문학상 발표에 중국 도서 판매사이트에서도 한강 붐이 불었다. '채식주의자' 등 번역된 작품 6편 모두 1위부터 상위를 차지했다. 과거에 대한 성찰, 부조리에 대한 지적, 금기에 대한 도전…. 우리 문학과 역사는 그 속에서 힘겨운 진전을 거듭해 왔다.
톈안먼 광장에서 그곳만 가린 벌거벗은 채로 톈안먼(권력중심)을 향해 손가락질 해대며 기성 권력을 조롱했던 아이웨이웨이의 예술활동을 중국에서 다시 볼 수 있을까. 민족 부흥을 앞세우며 더 많은 성역을 만들어 내고 있는 중국의 발전 모델은 지금 위태로운 외줄타기 속에 있다.
june@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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