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30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오른쪽)와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한국경제 고르디우스의 매듭 풀기: 지속 가능 경제를 위한 구조개혁\'이라는 주제로 타운홀 미팅을 열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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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이 해야 할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저출생·고령화, 지역 불균형과 수도권 집중, 연금 고갈과 노인 빈곤, 교육 문제, 소득·자산 불평등, 노동 시장 이중 구조 등 (…) 여러 구조적 문제들 앞에서 우리의 연구 영역을 통화 정책의 테두리 안에만 묶어둘 수는 없습니다. (…) 한국은행이 ‘한은사’에서 벗어나 ‘시끄러운 한은’으로 거듭나도록 하자는 것이 제가 취임 때부터 밝혔던 포부이고, 그 길을 향해 여러분과 함께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2024년 6월12일 이창용 총재의 한국은행 창립 74주년 기념사 중에서
이창용 총재의 한국은행이 저출생, 수도권 집중, 입시제도 개혁 등 사회 이슈와 관련해 구조개혁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이 총재가 취임한 이듬해인 2023년께부터 시작된 이런 ‘시끄러운 한은’이 한국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동시에 이들 이슈에 대한 사회적 토론, 한은의 역할에 대한 논란도 일으키고 있다.
‘지균 전형 확대’로 입시제도 개선
이 총재는 2024년 9월24일 공개된 영국 신문 ‘파이낸셜 타임스’와 한 인터뷰에서 “한국 교육 시스템에 찬사를 보내는 세계 지도자들은 그 실상을 알지 못한다. 서울의 부자들은 6살 아이를 대학 입시학원에 보낸다. 여성들은 자녀 교육을 위해 일을 그만둔다. 이 치열한 경쟁은 경제를 해치고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 (사람들이) 서울을 떠나도록 하는 등 ‘과감한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강한 발언이었다.
이런 이 총재의 발언은 2024년 8월27일 한국은행 경제연구원이 발표한 ‘입시 경쟁 과열로 인한 사회문제와 대응 방안’이란 보고서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보고서를 보면, 2018년 서울의 일반고 3학년 학생의 인구는 전국의 16%였지만, 다음해 서울대 입학생 중 32%였다. 또 서울의 강남 3구(강남, 서초, 송파) 일반고 3학년 학생의 인구는 전국의 4%였지만, 서울대 입학생 중 12%였다. 서울과 강남의 고등학생들은 인구 비중보다 2~3배 더 많이 서울대에 입학했다.
이 보고서는 특히 서울대에 입학한 서울과 비서울 지역 학생들의 진학률 격차의 원인을 분석했는데, 92%가 ‘거주지역 효과’로 나타났다. 8%만 학생들의 잠재력 차이로 나타났다. 거주지역 효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의 경제력’과 ‘사교육 환경’이었다. 전국에서 강남 지역 학생들의 서울대 진학률이 가장 높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 서울 학생들의 높은 서울대 진학률은 비서울 학생과 부모들이 사교육 환경이 좋은 서울로의 이주를 자극함으로써 서울 집값을 올리는 원인이 된다고 이 보고서는 밝혔다. 동시에 서울에서 사교육비와 집값의 상승은 20대 때 서울로 대거 이주하는 전국 청년들이 결혼과 출산을 꺼리는 원인이 된다. 2023년 서울의 합계출산율은 0.55명으로 전국에서 꼴찌였다. 청년의 서울 이주와 서울의 저출산이 악순환하는 것이다.
이 보고서는 이런 악순환의 대안으로 ‘지역별 비례선발제’를 제안했다. 2005년부터 서울대에서 시행하는 ‘지역균형 전형’(정원의 15~20%)을 전면 확대하자는 것이다. 서울 상위권 대학들이 스스로 입학 정원의 대부분을 지역별 학생 인구 비율을 반영해 선발하는 것이다.
한은은 새로운 지역 간 균형 발전 전략도 제시했다. 2023년 11월과 2024년 6월 발표한 보고서에서 지방의 거점 대도시를 중심으로 전국을 균형 발전시키자고 제안했다. 이것은 기존의 혁신도시 정책이나 메가시티 정책, 광역 시-도 분리 발전 정책과 사뭇 다른 내용이었다.
이 보고서는 기존의 10개 혁신도시에서 대도시 안팎의 신시가지형이 대도시 외부 신도시형보다 인구 증가와 고용·생산 유발 효과가 컸다는 점에 주목했다. 다른 선진국에서 지방 거점 대도시의 수가 남한 면적에 해당하는 10만㎢당 2~6개 정도였다는 점도 밝혔다. 또 지방 거점 대도시는 단위(1) 생산성 증가에 따른 총생산 증가가 1.3으로 수도권 1.1, 지역 중소도시 0.8보다 더 컸다. 광역권 내 경제적 파급 효과도 거점 대도시(광역시)가 광역도보다 훨씬 컸다.
서울 고등학생들의 명문대 진학률이 높은 것은 부모의 경제력, 사교육 환경 때문으로 나타났다. 2023년 5월 서울 대치동 학원가의 모습. 백소아 한겨레 기자 thanks@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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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 발전 위해 지역 거점 대도시 육성
따라서 두 보고서는 수도권으로의 쏠림을 완화하려면 지방에 서울과 경쟁할 수 있는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거점 대도시들을 키워야 한다고 밝혔다. 먼저 공항과 고속철도역, 대규모 문화·의료 시설, 교육 시설, 수도권에서 2차로 이전하는 공공기관을 거점 대도시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또 거점 대도시는 잘할 수 있는 소수의 산업을 선택해야 하며, 첨단 지식 산업은 거점 대도시 안에서도 좁은 지역에 집중시켜야 한다고 밝혔다.
저출산은 2023년 이후 한국은행이 가장 큰 관심을 가진 사회 이슈였다. 한은은 2023년부터 현재까지 5편 이상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2024년 9월 발표한 ‘초저출산 원인 및 정책 효과 분석: OECD 국가 분석을 중심으로’ 보고서에선 초저출산의 원인과 그 대책에 따른 결과를 소개했다.
이 보고서에서 초저출산의 원인과 대책으로 꼽은 항목은 모두 여섯 가지다. △가족 관련 정부 지출 △육아휴직 실제 이용 기간 △청년층 고용률 △혼외 출산율 △도시 인구 집중도 △실질주택가격지수 등이었다. 앞의 네 가지가 높아질수록, 뒤의 두 가지가 낮아질수록 출산율에 긍정적 영향을 줄 것으로 분석됐다.
한국의 가족 관련 정부 지출은 2019년 전체 예산의 1.4%까지 늘어났으나, 한국을 제외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오이시디) 평균 2.2%에 미치지 못한다. 또 여성 육아휴직 허용 기간은 52주로 오이시디 평균 69주보다 짧다. 육아휴직 이용률의 중간값은 19.8%로, 오이시디 평균 88.4%보다 훨씬 적게 사용한다. 한국의 청년층 고용률은 높은 대학 진학률, 군 복무, 좋은 일자리를 얻기 위한 투자 등으로 인해 오이시디 평균보다 8.3%포인트 낮다. 한국의 혼외 출산율은 2019년 2.3%로 오이시디 회원국 가운데 최하위권이고, 오이시디 다른 나라들의 혼외 출산율 평균은 43.0%에 이르렀다.
한국의 도시 인구 집중도는 오이시디 최상위 수준인데, 특히 서울의 인구 밀도는 지방 대도시의 4~15배, 경기도 지역 광역도 인구밀도의 4~15배에 이르렀다. 수도권 전체의 인구밀도는 1㎢당 2206명으로 지역 대도시보다 약간 낮은 수준이다. 한국과 다른 오이시디 국가들의 주택 가격은 2000년 이후 모두, 꾸준히 상승했다.
대도시 안에 공공기관을 이전해 혁신도시의 대표적 성공 사례로 꼽히는 부산 문현지구.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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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율 높이는 6가지 방안
이 보고서는 한국의 출산율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요인으로 도시 인구 집중도를 꼽았다. 이것은 주로 수도권 인구 집중에 따른 결과다. 보고서는 이것을 오이시디 평균 수준으로 끌어내리면 출산율이 0.414 올라갈 것으로 예상했다. 두 번째 요인은 혼외 출산율이었다. 한국의 낮은 혼외 출산율을 오이시디 국가 평균 수준으로 높이면 0.159의 출산율 상승 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단기적으로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다. 이어 이 보고서는 청년층 고용률, 육아휴직 실제 이용 기간, 가족 관련 정부 지출을 오이시디 평균 수준으로 높이고, 실질주택가격지수를 2015년 수준으로 낮출 것을 주문했다. 이 여섯 가지 조건이 모두 충족되면 합계출산율은 0.845 높아질 것으로 예상됐다. 이것을 2023년 출산율 0.72와 더하면 출산율은 1.565가 된다.
이 밖에도 한은은 기후위기, 베이비붐 세대 은퇴, 고령화, 가계 부채, 소득 불평등, 고용 확대, 취학 나이 등 다양한 사회 이슈에 대해 보고서를 발표했다. 2023년 이후 사회 이슈 관련 보고서만 20편이 넘는다.
‘시끄러운 한은’에 대해 반응은 엇갈렸다. 먼저 경제 정책의 핵심 부처라고 할 기획재정부는 긍정적이었다. 2024년 9월30일 이창용 총재를 만난 최상목 경제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이 총재가 공론화해 앞바퀴 역할을 해주시는 것이고 우리는 뒷바퀴 역할로 일을 수습해나간다. (…) 시끄러운 한은이 된 총재의 용기와 결단을 굉장히 존중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도 대체로 ‘시끄러운 한은’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조세재정연구원장을 지낸 황성현 인천대 경제학과 교수는 “저출산, 균형 발전, 교육, 집값, 가계 부채 등은 한은의 통화·금융 정책과 연결된 문제들이다. 또 한은 내부에 좋은 연구 인력이 많으니 경제 전반의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은행에서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게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한국은행 금융경제연구원에서 일한 적이 있는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한국은행은 국책 연구기관과 달리 행정부에 대해 중립적 위치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 또 행정부나 국책 연구기관이 말하기 부담스러운 문제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다. 한은이 중요 의제를 공론화하는 것은 사회에 도움 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시끄러운 한은’은 윤석열 정부나 국책 연구소에서 중요한 사회 이슈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데 따른 현상이란 분석도 나온다.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은이 제기한 사회 이슈는 국민의힘이나 더불어민주당에서도 그 내용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정부에서는 이런 구조적 문제들이 방치되고 있다. 한은이 아니라 대통령실이나 관련 부처에서 이런 문제를 국정의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2022년 4월 이창용 총재가 취임한 뒤 한국은행이 여러 사회 이슈에 대한 연구 보고서를 잇따라 발표해 주목을 받고 있다. 서울 중구 한국은행 본관. 공동취재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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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공론화 도움” vs “본연 업무 더 집중”
그러나 모두가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2024년 3월 발표한 ‘돌봄서비스 인력난 및 비용 부담 완화 방안’이란 보고서는 이주노동자 차별 논란을 일으켰다. 이 보고서는 이주노동자 고용허가제 업종에 돌봄 서비스를 추가하고 해당 업종의 최저임금을 상대적으로 낮게 설정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당시 노조와 시민단체들은 “이미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 환경에 시달리는 돌봄 노동자들에게 부담을 전가해 국가의 책임을 회피하는 방안”이라고 비판했다.
또 이 총재는 2024년 4월 사과 등 농산물 가격이 폭등한 것과 관련해 “농산물 수입을 통해 근본적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해 논란을 일으켰다. 이에 대해 2024년 5월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농산물 수입으로) 생산 기반이 완전히 무너지는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고 완곡하게 반박했다.
한은이 금융·통화 정책이라는 본연의 업무에 더 집중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우석진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은에 우수한 연구 인력이 있으니 다른 이슈에 대해 보고서를 낼 수 있다. 그러나 이벤트를 열어서 내용을 발표하고, 총재가 나서서 이슈화하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 또 한은이 이슈를 제기한 뒤 지속적으로 끌고 나갈 역량이나 책임감이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 총재의 정치적 야망이 반영된 활동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이 총재는 하버드대 박사, 서울대 교수, 금융위원회 부위원장, 국제통화기금(IMF) 아시아태평양 담당 국장 등 화려한 경력을 갖고 있다. 윤 정부 들어 경제 부총리 물망에도 올랐다. 우석진 교수는 “현재까지 경력이나 역량으로 볼 때 경제 부총리로 일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현재 업무에 집중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길이다. 바로 한은의 독립성을 더 확보하고, 금리 정책을 더 효과적으로 운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러 의견에 대해 한은의 이상호 부공보관은 “한은이 제기한 사회 이슈들은 통화 정책이나 장기 성장과 무관하지 않다. 그동안은 사회 이슈를 연구해도 안에서 참고하는 수준이었지만, 이 총재가 오고 나서 이런 중요한 문제에 대해 사회적 토론을 해보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이 총재가 정치적 야망을 갖고 이런 활동을 한다는 의견엔 동의할 수 없다. 오히려 그런 생각이 없어서 자유롭게 발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규원 선임기자 ch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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