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2.22 (일)

[특파원 칼럼/임우선]미국 서점에 ‘채식주의자’가 동이 난 이유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동아일보

임우선 뉴욕 특파원


“하루 종일 너무 많은 사람이 물어보는데 ‘베지테리언(채식주의자)’은 없어요. 어제 다 나갔거든요.”

11일(현지 시간) 오전 미국 뉴욕 맨해튼의 인기 서점 ‘스트랜드’의 직원은 아쉬워하며 이렇게 말했다. 사실 책은 몇 년 전 이미 읽었다. “괜찮다”고 말하고 흐뭇하게 돌아섰다.

가만 보면 놀라운 일이었다. 이전에, 지구 반대편의 어떤 몰랐던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그날 당장 서점으로 달려가서 책을 사 본 적이 있던가. 그런데 수상 당일 채식주의자는 아마존 문학 분야 베스트셀러 1위를 했다. 아마존 앱을 열어볼 때마다 순위가 올라가더니 수상 발표 반나절 만에 그렇게 됐다.


도서관 지원에 적극적인 지역사회


미국인은 책을 좋아한다. 어딜 가든 책 읽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공원에서, 카페에서, 지하철에서…. 그들은 여기저기서 책 또는 킨들(아마존의 전자책 전용 단말기)을 들고 있다. 미국 안에서도 책 읽는 사람이 예전만 못하다는 우려가 나온다. 하지만 성인이 연평균 4권 정도의 책을 읽는 것으로 조사되는 한국에 비하면 미국은 12권으로 여전히 세 배나 더 많다.

미국인이 책을 많이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지하철을 떠올려 본다. 12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뉴욕 지하철에선 인터넷이 전혀 안 터진다. 놀랍지만 사실이다. 역에 설 땐 잠깐 터지지만 출발하면 다시 먹통이다. 그래서 책이 없으면 상당히 무료하다. 하지만 이런 1차원적 이유가 전부는 아니다. 인터넷이 잘 터지는 곳에서도 책을 든 사람들은 항상 있다. 휴가지인 해변가와 숲속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었다.

그리고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미국 어딜 가든 동네마다 가까이에 있던 도서관, 그곳에서 두세 살 때부터 옹기종기 모여 앉아 책을 보던 어린아이들의 모습이었다. 미국 지역 사회는 도서관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커뮤니티 또한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올 초 뉴욕시가 늘어난 난민으로 재정이 부족하다며 도서관 관련 재정을 깎으려다 시민들이 연판장을 돌리는 등 거세게 반발해 결국 항복했을 정도다.

미국의 도서관 시스템은 아주 체계적이다. 각 연령층에 맞는 특별 활동과 북클럽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도서관마다 매일 짜여 돌아간다. 대출 규모도 한 번에 최대 50권을 3주간 빌려 주는 식으로 한국에 비하면 통이 크다. 아이를 둔 부모들은 아예 손수레를 끌고 와 수레 가득 책을 빌려 담고 사라지길 수시로 반복한다.


초등생 필수 숙제가 ‘하루 20분 책 읽기’


초등학교에서도 대부분 내주는 숙제가 ‘하루 20분 책 읽기’다. 독서일지에 어떤 책을 몇 분간 읽었는지 매일 적고, 부모의 사인과 함께 제출하면 선생님이 간단한 칭찬을 써서 되돌려 주는 식이다. 처음엔 20분을 목표로 시작하지만 나중엔 20분만 읽고 끝나는 경우는 없다. 그렇게 오랫동안 단단하게 책을 사랑하며 자라 온 사람들이 어른이 돼서도 책을 읽는 것으로 보인다.

서점을 나오며 계산대를 봤다. 오프라인 서점의 책 가격은 아마존에 비하면 두 배 정도 비싸다. 하지만 그곳에는 오늘도 요령 없는 미국인들이 책을 사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어릴 때부터 서점과 도서관에 다니며 많은 책을 보고, 자신이 원하는 책을 고르는 습관이 배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오프라인 서점은 특별한 곳으로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책을 샀다. 일부 신간을 비닐로 꽁꽁 싸 펴볼 수 없게 하는 한국의 대형 서점들과 달리, 모든 책을 마음껏 볼 수 있게 해준 서점에 대한 고마움이자 최소한의 예의였다.

임우선 뉴욕 특파원 imsun@donga.com

ⓒ 동아일보 & dong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