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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1 (토)

퇴직했더라도 줄이지 말아야 할 3가지[정경아의 퇴직생활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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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일러스트레이션 갈승은 atg101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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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아 작가·전 대기업 임원


회사를 떠난 후 당황스러웠던 것은 나를 둘러싼 환경의 변화였다. 30년을 출근했던 직장도, 매일 인사를 나눴던 동료들도 더는 내 곁에 없었다. 영원하리라 믿었던 모든 것들을 순식간에 앗아가는 퇴직의 힘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퇴직자 신분이 된 나의 마음도 전과는 달라졌다. 미처 준비하지 못한 앞날에 대한 걱정은 나를 한없이 움츠러들게 했다. 형편이 예전 같지 않으니 급한 대로 무조건 아끼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퇴직 후라도 결코 줄여서는 안 되는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 나를 위한 마음이다. 퇴직 후 나는 오랫동안 상실감에 시달렸다. 회사에서의 역할이 사라지자 자신이 무의미한 존재라고 여겨져 참을 수 없었다. 온종일 할 일 없이 보내는 내 모습이 마땅치 않았고, 게으른 사람처럼 보여 견디기 어려웠다. 뭔가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끊임없이 나를 몰아붙였다. 안타깝게도 뒤따라오는 실패는 또다시 스스로를 질책하게 했고 끝 모를 악순환은 계속되었다.

결국 나는 지독한 불면증에 걸리고 말았다. 우울증도 함께 찾아왔다. 일촉즉발의 상황 앞에서 내가 선택한 것은 휴식이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종일 걷고 쉬면서 삶을 재정비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서서히 회복되는 것이 느껴졌다. 나에게 고맙다, 수고했다 말하니 덧난 상처도 아무는 듯했다. 그때 깨달았다. 퇴직 후에는 나를 위하는 마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퇴직 전에는 나 자신을 채찍질했다면 퇴직 후에는 나를 성심껏 돌봐야 했다.

둘째, 가족을 위한 시간이다. 회사를 나와서 연이어 당혹스러웠던 것은 가족의 낯선 모습이었다. 한집에서 살기는 했으나 아침 일찍 출근하고 저녁 늦게 퇴근하는 바람에 사실상 대화를 나눌 겨를이 거의 없었다. 퇴직 후 마주한 가족들은 그간 내가 알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이해 못 할 행동을 많이 했다. 그럴 때면 그냥 지나치지 못해 잔소리를 했고 여지없이 가족들과 크게 충돌하였다. 퇴직도 했으니 이제부터라도 가족들과 잘 지내고 싶다는 속마음과는 다르게 관계는 빠르게 악화되었다.

얼마나 부딪쳤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은 갑작스럽게 집으로 돌아온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 같았다. 고민 끝에 내 멋대로 다가가기보다 가족들에게 적응할 시간을 주기로 했다. 이후 나는 최대한 가족들을 존중하면서 편안하게 해주려고 노력했다. 기껏 차려놓은 밥을 먹지 않아도, 욕실 불을 노상 켜고 다녀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가족들은 점차 그런 날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나 역시 그들의 삶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퇴직한 나를 퇴직 전과 똑같이 대해주는 이들은 오직 가족뿐이었다.

셋째, 기회를 위한 돈이다. 퇴직이 염려되는 가장 큰 이유는 돈이었다. 고정 수입은 사라졌는데 내가 가진 자산만으로는 남은 인생을 살아가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경제적으로 불안해지자 허리띠부터 졸라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절감할 수 있는 지출에는 한계가 있었다. 주거비 등과 같은 고정비는 물론이고 식비와 같은 생활비도 큰 폭으로 낮추기는 힘들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제일 쉽게 줄일 수 있는 돈은 나를 위해 쓰는 비용이었다.

초기에는 괜찮았다. 확실히 돈도 절약되는 듯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집 안에만 틀어박혀 세월을 낭비하는 나를 발견했다. 지출을 안 하려니 저절로 활동이 적어진 거였다. 재취업을 위한 공부도, 새로운 시도도 모두 중단됐다. 이러다가는 나의 미래가 더욱 암울해질 것 같았다. 그제야 관심 있는 강좌를 검색해 보니 예상보다 훌륭한 교육 프로그램이 많았다. 꼭 큰돈 들이지 않더라도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배우는 것이 가능했다. 그때 배운 기술들은 요즘 나의 직업이 되었다.

흔히 접하는 퇴직자를 위한 조언을 들어보면 대부분 아끼라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대출이자 적게 내는 법, 보험료 거품 빼는 법 등. 그러다 보니 퇴직자들은 즉시 줄이지 않으면 훗날 거대한 재앙을 만날 것 같은 불안감을 느끼며 정작 아끼면 안 되는 것들까지 아끼는 착오를 범한다. 약간의 돈을 아낄 수 있을진 몰라도 마음은 위축되고 태도는 소극적으로 변한다.

퇴직하고 보니, 퇴직자에게 필요한 것은 무작정 안 쓰고 아끼는 것이 아니었다. 써야 할 것과 쓰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는 지혜였다. 나 또한 경비를 축소하는 데만 역점을 두지 않고, 나 자신에게 투자했다면 더 빨리 자리를 잡았을 것 같다는 후회가 든다. 퇴직하셨거나 앞두고 계신다면, 너무 아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현재의 행복과 미래를 위한 준비까지 줄이는 실수는 하지 않으시길 바란다.

정경아 작가·전 대기업 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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