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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 (금)

노벨문학상 영예는 번역의 쾌거이기도…"이제부터가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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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번역, 영어·한국어 모두 능통한 3세대 번역가들로 진화 중

데버러 스미스·안톤 허·김소라·최경란 등 맹활약

"번역의 양과 질 향상 힘입어 한국문학 세계중심 진입…더 체계적 지원 필요"

(서울=연합뉴스) 김용래 기자 = 한강이 한국인 최초이자 아시아 여성 작가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이라는 큰 영예를 거머쥔 데에는 작가 본인의 문학적 역량 외에도 민관의 노력으로 문학 번역의 질과 양이 꾸준히 향상된 것이 큰 몫을 했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한국문학에 대한 세계인들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문학번역을 더욱 체계적이고 전략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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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
[연합뉴스 자료사진]


◇ "부커·메디치상 수상으로 노벨상 예심 이미 통과"

한강은 2016년 연작소설 '채식주의자'가 영국 최고권위 문학상인 부커상 국제부문(현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수상한데 이어, 지난해 장편 '작별하지 않는다'가 프랑스 4대 문학상 중 하나로 꼽히는 메디치상 외국문학 부문까지 받으면서 사실상 노벨문학상의 '예심'을 통과한 것과 다름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문학평론가이자 프랑스 문학 전문번역가인 김화영 고려대 불문과 명예교수는 10일 노벨문학상 발표 직후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부커상과 메디치상을 받으며 한강이 사실상 '예심'을 통과한 것과 같았다"며 노벨위원회가 이미 영어권과 프랑스어권 문학시장에서 검증된 한강을 낙점한 것 같다고 말했다.

노벨문학상은 부커상이나 메디치상 등 다른 저명한 문학상과 달리 수상자 선정 전에 따로 후보를 추리지 않고 발표하기 때문에 '예심'이라는 것은 비유적인 표현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문학 작품을 탄생시키고 있는 두 주요 언어인 영어와 프랑스어권 독자들에게 그만큼 작품이 널리 읽힐 제반 환경이 조성됐다는 뜻에서다.

한강이 이런 '예심'을 통과한 첫발은 소설 '채식주의자'의 영어 번역이었다.

한강의 문학세계를 '채식주의자'로 가장 먼저 세계에 널리 알린 번역가는 영국인인 데버러 스미스다.

케임브리지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그는 번역가로 진로를 정하면서 영미권 문학번역 업계에서 '틈새시장'이었던 한국에 관심을 둔다. 2010년 한국어를 독학으로 배우기 시작해 런던대 동양 아프리카대(SOAS)에서 한국학 석·박사 과정을 밟으며 한국 문화 전반에 대한 이해도를 넓혔고, 한국어 학습을 시작한 지 단 5년 만인 2015년 1월 영국에서 '채식주의자'의 영어판을 처음 펴냈다. 그리고 1년 뒤인 2016년 작가 한강과 함께 인터내셔널 부커상의 영예를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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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데버라 스미스와 한강
2016년 부커상 수상 직후. [EPA=연합뉴스 자료사진]


부커상 국제부문(비영어권 문학)은 작가 본인과 함께 번역자의 노고를 동등하게 인정해 번역자를 함께 시상하는 것이 큰 특징이다.

'채식주의자' 이후에도 다양한 한국 작품들을 영미권에 소개하고 있는 스미스는 한국문학 번역의 2.5세대 정도로 분류된다.

한국문학의 외국어, 특히 영어 번역은 영국이나 미국 유학을 다녀온 대학교수 그룹인 1세대, 한국어를 학습한 외국인 교수와 공동작업을 하는 2세대 번역가들에 이어, 영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하면서 한국어와 한국문화의 맥락에 대한 이해가 뛰어난 3세대 번역가로 진화하고 있다.

현재 활약 중인 번역가로는 정보라의 '저주토끼' 번역으로 인터내셔널 부커상 최종후보에 작가와 함께 올랐던 안톤 허(허정범)와 번역가 황석영의 '철도원 삼대'를 영어로 옮긴 김소라(소라 김 러셀) 등이 있다.

'저주토끼'와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 황석영의 '수인', 방탄소년단(BTS) 회고록 '비욘드 더 스토리' 등을 영어로 옮긴 안톤 허는 내년 인터내셔널 부커상의 심사위원으로 위촉되는 영예도 안았다.

김소라는 올해 인터내셔널 부커상 최종후보에 올랐던 '황석영 전문가'로 불릴 만큼 그의 작품들을 다수 영어권에 소개해온 베테랑으로 꼽힌다. 2019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1차 후보(롱리스트)에 올랐던 황석영의 또 다른 장편 '해질 무렵'(영어판 'At Dusk')도 그가 번역했다.

프랑스에선 최경란 번역가가 눈에 띈다.

한국에서 불문학을 전공한 뒤 프랑스에 유학 후 파리에 정착한 최경란은 불어권의 대표적인 한국문학 전문 번역가 중 한 명이다. 그가 프랑스인 번역가인 피에르 비지우와 공동으로 작업한 '작별하지 않는다'의 불어판은 지난해 11월 한강에게 메디치상 외국문학 부문의 영예를 안겼다.

최경란과 피에르 비지우는 박상영의 소설집 '대도시의 사랑법'도 함께 작업했는데 이 작품 역시 올해 메디치상 외국문학 부문 1차 후보에 오르는 성과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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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상 받은 한강
지난해 11월 프랑스 파리에서 메디치 외국문학 수상 뒤 관계자들 앞에서 발언하는 한강 작가. [연합뉴스 자료사진]


◇대산문화재단·한국문학번역원, 번역지원 '민관 쌍두마차'

이렇게 한국문학이 주요 문학상에서 좋은 성적을 내면서 한국문학에 대한 해외 독자와 평단, 출판계의 관심이 높아지고, 이것이 다시 문학상에서의 성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가 구축되고 있다.

민간에서는 대산문화재단이, 정부 쪽에서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문학번역원이 수십 년 전부터 한국문학의 외국어 번역을 전략적으로 육성·지원해오고 있다.

한국문학번역원은 1996년 설립 후 현재까지 44개 언어권에 총 2천171건의 번역출간을 지원했다.

한강의 작품들 역시 번역원의 지원으로 영어, 불어 등 28개 언어로 번역돼 전 세계에서 총 76종의 책으로 출간됐다.

대산문화재단(이사장 신창재)은 올해 번역 지원 사업에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의 스페인어 번역을 비롯해 현기영의 대하소설 '제주도우다'의 영역과 중역, 이성복 시집 '그 여름의 끝'의 영역 등을 선정하는 등 꾸준히 한국문학 세계화 지원사업을 벌이고 있다.

한국문학의 내적 역량과 자산이 축적되는 가운데 정부와 민간의 체계적인 번역 지원이 더해지면서 어느덧 '문학 한류'가 안정적인 성장기에 진입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곽효환 전 한국문학번역원장은 "한국 문학이 뛰어난 번역에 힘입어 최근 몇 년 사이에 놀라울 정도로 세계 무대의 중심으로 진입을 한 것으로, 그 결과가 이번에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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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로 번역된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작품들
(도쿄 교도=연합뉴스) 일본어로 번역된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작품들. 2024.10.11 [재판매 및 DB 금지] sungjinpark@yna.co.kr


대산문화재단에서 한국문학 번역 관련 사업을 총괄하다가 한국문학번역원장을 지낸 그는 노벨문학상 발표 직후 여기저기서 축하 전화를 받고 있다면서 "세계문학으로서의 한국문학의 때가 됐다고 말하곤 했었는데, 노벨상을 예상한 건 사실이지만 예상보다 이르게 소식이 전해져 놀랍다"고 했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쾌거로 한국 문학에 대한 세계인들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한국 문학은 3세대, 나아가 4세대 번역가들까지 더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지원·양성하는 과제도 남아 있다.

민간에서는 대산문화재단 외에 문학번역을 체계적으로 지원 육성하는 기업이나 재단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정부 차원의 관련 예산 지원이 더 큰 안목에서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곽 전 원장은 "한국 문학은 문학 한류의 성장기로 이미 진입했다"면서 "이제부터가 진짜다. 향후 수년간 이런 흐름에 어떻게 준비하고 어떻게 다음 단계를 밟느냐가 이른바 K-문학, K-컬처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yongla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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