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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2 (일)

[김윤철의 알고 싶은 정치]새로운 ‘도전자 정당’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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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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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도전자 정당이기 위해선 세 가지가 요구된다. 우선 기성 거대 정당의 ‘파생정당’이어선 안 된다

정당 민주주의에 대한 기존 관념서 벗어나고, 또한 시작부터 딜레마 해소의 역량 마련에 주력해야 한다

이 요건들을 충족하는 새 도전자 정당 출현을 꿈꾼다. 고역스러운 보통사람 일상서 다다를 수밖에 없는 ‘희망의 원리’다

22대 국회에 들어서도 정치는 여전히 엉망이다. 달라짐의 단초라도 찾아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작금의 정치는 이른바 ‘리스크의 향연’에 다름 아니다. 사법 리스크, 가족 리스크가 정치 세력 간 경쟁의 주메뉴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고단한 세월을 지내고 있다. 집값만이 아닌 생필품 가격마저 크게 오른 물가 인상 국면에 들어선 지 오래다. 소득과 고용의 불안정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야 하는 삶의 현실에 처한 지도 이미 오래다.

이런 일상적 생활의 위기를 넘어서서 기후재앙과 핵 전쟁으로 인한 인류와 문명의 절멸이 거론되기도 한다.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처럼 오래된 수도가 바닷물에 잠길 위험에 직면해 이전을 추진할 정도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 전쟁은 예상과 달리, 장기화되었고 확대되는 형세다. 이런 와중에 핵무기 사용은 더 이상 금기가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한반도 역시 남북한 관계 파탄의 고도화로 인해 그 파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독자 핵무장론과 두 개의 국가론은 그런 맥락에서 나왔다.

칼도 경(經)도 없는 보통사람들

일각에서는 인공지능(AI) 열풍에 기대어 새로운 진화를 내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그간의 산업혁명과 과학기술 발전의 역사적 경험을 상기할 때, 고된 노동을 통해 먹고살아 가야 하는 다수의 보통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진화가 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대런 아세모글루와 사이먼 존슨이 <권력과 진보: 기술과 번영을 둘러싼 천년의 쟁투>를 통해 새삼 확인시켜 주었듯이, 보통사람들이 기술과 번영의 (기여한 만큼이라도) 덕을 보려면 ‘길항권력’, 즉 기술과 번영의 성과를 독점하려는 지배집단을 견제할 정치적 힘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 플랫폼 자본 지배체제에서 노동자들이 겪는 피착취적 삶의 현실이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듯이, (이 글을 쓰는 나도 포함해) 보통사람들은 칼도 경(經)도 갖고 있지 못하다.

보통사람들이 이런 궁지에서 벗어나는 길, 그리고 엉망인 정치를 좋게 만들 가능성을 키울 방법은 애석한 것인지 혹은 다행인 것인지, ‘단 하나’밖에 없다. 바로 기성의 질서에 저항하고 새로운 질서를 지향하는 정치적 도전자로서의 정당을 만들고 키우는 것이다. 적어도 기성 주류 세력이 긴장하고 위협감을 느껴 스스로를 회초리로 쳐 바른 질서를 도모하고(政), 보통사람들의 복리를 증진시키려는 노력(治)을 유도하는 대안 정치 세력의 조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지난 총선 이후 그 결과에 구애받지 않는 기성 정치세력들을 보며, 그리고 도전자를 자처했던 정의당의 퇴락을 보며 정치적 판단과 선택을 중단했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작지만 꽤 흥미로운 변화를 목도했다. 그간 정당정치에, 심지어 진보정당에 대해서조차 회의적·비판적이던 이들이 새로운 정당 만들기의 필요성을 주창하는 모습을 본 것이다. 현재에 안주하는 자는 ‘대통령 만들기’에 나서지만, 미래를 꿈꾸는 자는 ‘정당 만들기’에 나서야 한다는 말도 들었다. 특히 나의 눈길을 끌고 귀를 기울이게 만든 것은 그 주창자들이 기성 거대 정당 주도의 질서에 다소 수용적이던 정치학자 혹은 유력 시민운동과 진보정당 활동가 출신 인사들이라는 점이었다. 새로운 정치적 도전자의 등장이 전혀 불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겠단 느낌이 희미하게나마 다시 살아났다.

도전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난 총선에서 원외 정당으로 밀려난 정의당의 실패를 포함해, 그간 원내 진입에 성공했던 여러 정당들의 명멸을 보면 실효성을 지닌 새로운 도전자의 위상과 역할을 갖는 것은 쉽지 않다. 지금도 새로운 도전자임을 자처하는 정당들이 있다. 조국혁신당, 사회민주당, 진보당, 개혁신당 등이 그들이다. 조국혁신당을 제외하면 존재감이 미약하다.

조국혁신당은 더불어민주당과의 관계에서는 연합 형성과 폐기의 역량을 선보이는 실효성을 발휘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제한적이다. 반윤석열과 검찰개혁 그리고 안티 뉴라이트를 빼면 무엇을 지향하는 정당인지 불분명하다. 활동 인지의 폭이 12석이 아니라 3석 정도를 가진 정당 같다. 미래지향적이라기보다, 또 보통사람들에게 길항권력을 제공하기보다 ‘정세긴박형 프로젝트 정당’ 같다. 정당 조직의 성격이 생성 초기의 패턴에 형성되고 규정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저 인상평일 뿐이라며 넘어갈 수만은 없다.

새로운 도전자 정당의 필수 요건

조국혁신당을 위시로 해 현존하는 군소 신생 정당들도 새로운 도전자 정당이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의 지금 형색 그대로는 안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아래에서 짚어볼 새로운 도전자 정당 등장의 필수 요건을 통해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도전자 정당이기 위해서는 우선 세 가지가 요구된다. 첫째, 기성 거대 정당의 ‘파생정당’이어서는 안 된다. 이념·정책적 정체성에서 현실타파적 경향을 강하게 띠는 신생 대안정당의 면모를 조기에 갖춰야 한다. 무엇보다도 3% 득표 미만을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더 나아가서는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는 (특히 지역에서) 독자적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이념·정책 정체성의 경계는 이를 고려해 설정해야 한다. 당 건설 주도층의 선호가 아니라, 보통사람의 처지와 요구에 초점을 맞추면 그리 된다. 그리고 보통사람들을 당의 주역으로 만들면 된다. 제3(지대)당으로 부르기도 했던 그간의 도전자 정당 실험의 실패는 그런 독자적 면모와 지지 기반을 신속히 갖추지 못함으로써 - 일시적으로는 두 자릿수 득표와 의석 보유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 결국 파생정당의 한계에 갇혀버렸기 때문이다. 즉 차분하고도 탄탄한 준비 없이 코앞에 닥친 선거에서의 정략적 유불리에 따라 급조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정당민주주의에 대한 기존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간 정당정치 현장에서 정당민주주의는 주로 ‘당내 민주주의’로 의미지어져 왔다. 하지만 정당민주주의의 더 큰 의미, 즉 정당이 민주주의의 주체이자 제도인 진짜 이유는 그들이 주도하는 ‘당 밖의 사회적 질서’를 민주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 있다. 정당 조직의 성격은 그러한 목적에 기여하는 것이어야 하지, 당 밖에서 이루지 못한 것을 당내로 좁혀 대신 구현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이런 정당(민주주의)이론의 ABC를 새삼 거론하는 것은 당내 민주주의 위주의 관념이 지배해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최근에 들어서 ‘이재명 민주당’과 ‘한동훈 국민의힘’ 모두에서 보이듯이, 리더십 형성 과정에서 당내 민주주의를 명분으로 내세워 (일시에 대거 입당한 팬덤 혹은 외부에서 영입된 정치 무경험자가 주도하는) ‘당원 의존성’을 키우는 편향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것이 문제인 이유는 그 과정에서 정치에서 소외되어 당 밖에 있는 보통사람들의 처지와 요구보다, 열성 당원의 호승심이 좌우하는 정치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10월2일) 영국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에 “Britain’s Conservatives adopt the bad habits of the Labour left(영국 보수당이 노동당 좌파의 나쁜 습관을 채택하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보수당마저 노동당 내 좌파가 그랬던 것처럼, 당내 민주주의를 앞세워 -그래서 경쟁력을 상실하고 입지가 축소되었던 것처럼- 당 밖의 유권자보다 당원의 지지에 기대어 당권을 차지하는 움직임이 더 중요해지고 강해졌다는 것을 우려하고 비판하는 기사다. 당원 의존성 강화와 그 부작용으로 몸살을 앓는 것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공통성을 안도와 안주의 핑계로 삼을 수는 없다.

셋째, 시작부터 딜레마 해소의 역량 마련에 주력해야 한다. 정체성 고수와 외연 확장 전략 간의 갈등에서, 그리고 신념과 책임 윤리의 충돌에서 겪을 딜레마를 정세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며 해소해나갈 ‘결단력과 설득의 힘’을 키우고 갖추고 있어야 한다. 정당정치는 햄릿의 숙명과 닮았지만, 동시에 햄릿의 비극을 넘어서야 할 운명도 안고 있다. 딜레마는 무엇을 선택하든 문제가 있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더 나은 선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택한 것을 더 나아지게 만들 의지와 실천을 요구하는 게 딜레마인 것이다. 이런 궁지를 애초에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은 새로운 도전자 정당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만들어도 오래가지 못한다.

이 세 요건을 충족하는 새로운 도전자 정당의 출현을 다시금 꿈꿔 본다. 지루하고 고역스럽고 모멸스러운 보통사람의 일상에서 다다를 수밖에 없는 ‘희망의 원리’다.

■김윤철

경향신문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로, ‘세계와 시민’ ‘정치의 인문학적 탐색’ 등의 과목을 가르친다. 참여사회연구소 부소장, ‘시민과 세계’ 편집위원,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소장, 노회찬정치학교 교장 등을 역임했다. <정당> <헬조선 3년상> 등의 저서와 ‘노동존중 정치와 노회찬의 6411정신’ ‘한국 불평등 민주주의의 정치사적 기원’ 등의 논문이 있다.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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