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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2 (일)

[월요 초대석]“많이 망해봐서일까요? 끝날 줄 알았는데, 다시 일어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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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役 배우로 인생 3막 여는 시각장애 송승환

상대 코앞까지 다가가야 얼굴 보이지만… 대사는 귀로 외고, 표정은 촬영해 확인

‘소년가장’ 인생 1막서 긍정하는 힘 얻어… 일상-연기 계속할 방법 찾아 골프 홀인원도

진통제 먹으며 무대 오르다 어금니 발치… 공연할 때마다 치아 뽑으면 몇 개나 할지

동아일보

2018년 갑작스레 시력을 상당 부분 잃었지만 여전히 파리 올림픽 개·폐회식 해설자 등으로 활발히 활동하는 송승환 PMC프러덕션 예술총감독. 1일 서울 중구 정동극장 연습실에서 만난 그는 “평생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았다. 이제 노역(老役) 배우로 연기를 계속하다 죽는다면 그게 행복일 것”이라고 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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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거기서 어떤 늙은 남자를 봤어. 그건 바로 나였어. 그리고 난 나한테 닥칠 일이 아직도 남았다는 걸 깨달았지. 고통과 죽음.” 8일 개막하는 연극 ‘더 드레서’(서울 중구 정동극장)에서 노(老)배우인 ‘선생님(Sir)’ 역을 연기하는 송승환 씨(67·PMC프러덕션 예술총감독)는 이 대사가 무척 마음에 와닿았다고 했다. 송 씨가 8세 때인 1965년 KBS 라디오 프로그램 ‘은방울과 차돌이’로 데뷔한 지 59년이 지났다. 턱선이 살아 있었던 쇼 프로 ‘젊음의 행진’ 진행자(1981∼1984)는 이제 눈가에 주름이 잡혔고, 치아 임플란트가 필요한 나이가 됐다. 송 씨는 “앞으로도 고통과 죽음뿐 아니라 닥칠 일이 많겠지만 인생 3막은 노역(老役) 배우로 마무리하고 싶다”고 했다.》

송 씨의 삶을 연극에 비한다면 인기 절정의 스타가 1985년 무작정 미국 뉴욕으로 떠나는 것에서 1막이 끝난다. 2막에서 그는 1997년 비언어극 ‘난타’를 성공시키고 2018년 평창 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을 맡으며 클라이맥스를 맞지만 갑작스레 망막색소변성증 등이 발병하며 시력을 대부분 잃는(시각장애 4급) 위기를 맞는다. 낙담해 움츠러들 법도 한데 송 씨는 다시 연극 무대에 서고 있다. 희곡 형식을 따온 이 인터뷰는 송 씨 인생의 3막 도입부에 해당한다.

● 1장 “최악이라고 말할 수 있는 동안은 최악이 아니다”(‘리어왕’)

[막이 열리면 1일 국군의 날 퍼레이드 직전의 소란함이 전해지는 정동극장 옥상이다. 사진기자가 송 씨의 모습을 여러 차례 촬영한 뒤 턱에 손을 가져다 댄 동작을 시연하며 “이렇게 하고 끝내자”고 말한다. 송 씨는 동작을 보지 못해 ‘바로 촬영을 끝내자’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지팡이로 더듬어 가며 폭이 좁은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이 꽤 익숙해 보인다.]

조종엽 기자 정말 잘 안 보이는구나. 얼핏 봐선 눈이 불편한 줄 잘 모르겠어.

송승환 이제 6년 됐으니 적응하면서 사는 거지. 아직도 답답할 때가 많아. 제일 무서운 게 계단이야.

시력이 그렇게 나쁜데 상대 배우 표정은 어떻게 읽어?

얼굴을 보려면 30cm까진 다가가야 하는데, 무대에선 안 되지. 그래서 연습 때 영상을 찍어. (태블릿PC를 꺼내 영상을 최대한 확대한 뒤 15cm 정도 앞까지 고개를 가져다 댄다.) 나중에 이렇게 상대 표정을 확인하는 거지. ‘여기서 노려봤구나, 웃음을 머금었구나, 빈정댔구나….’ 그 표정을 외워. 또 귀가 예전보다 민감해져서 말투로도 느껴.

대본은 어떻게 읽어?

그냥 TTS(Text to Speech·음성 합성)로 듣고 외워. SNS 메시지도 AI 스피커로 들어.

발병하고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싶지 않았어?

자료를 찾아보니 내 병의 후유증이 ‘우울증과 자살’이라고 나오더라. 난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치료법을 찾아 나섰어. 미국까지 가서 권위 있는 의사를 만났는데, ‘도저히 방법이 없다’더군. 굉장히 낙담했지. 그날 밤 호텔에 혼자 있는데 갑자기 서러워서 눈물이 났어. 그냥 시원하게 실컷 울었어. 그리고 휴대전화 문자 확인부터 하나씩 생활과 연기를 계속할 방법을 찾아온 거지. 그게 재밌고 신났어. (지팡이를 들어 보이며 손잡이에 붙은 손전등을 켠다.) 이것도 내가 개발한 거야. 전 세계에 하나밖에 없어. 밤에 특히 잘 안 보이는데, 이걸 쓰니 밤거리도 안 무서워. 자신감이 생기는 게 기분이 좋더라고.

도움말을 주는 사람이 없었어?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더라고. 메시지를 귀로 들어야 하는 사람이 내 주변에 없었으니.

여전히 골프를 즐긴다고? 공이 보여?

골프장은 넘어져도 잔디밭이니 나에겐 굉장히 안전한 공간이야. 중심 시력이 죽었고, 주변 시력은 좀 살아 있어. 그래서 (고개를 돌리며) 옆눈으로 보면 공이 솜뭉치처럼 조금 보여. 방향은 캐디와 동반자가 가르쳐주고, 그린에 올릴 때는 망원경으로 햇빛에 반짝이는 벙커나 큰 나무 같은 지형지물을 살피고 대강 감을 잡지. 재작년엔 눈이 잘 보일 때도 못 하던 홀인원을 했어. 요점은 방법을 찾아내는 거야.

그런 긍정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 거야?

생방송이나 연극을 많이 해봐서일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걸 여러 번 실감했어. 내일 도저히 막을 못 올릴 것 같았는데, 막이 오르더라고. 어렸을 때 집안이 많이 망해 봐서 경험치가 있었던 거 같아. 끝날 줄 알았는데, 안 끝나고 다시 일어나더라고.

● 2장 “가슴 속이 돌로 가득 찼어”(‘더 드레서’)

[젊은 송승환이 부모와 함께 사는 집에 돌아오면 채권자들이 거실을 차지하고 있다. 송승환, 트렁크에 신발과 의상을 챙겨 친구 집으로 들어간다.]

어릴 적부터 소년가장 격이었지?

드라마 ‘여로’(KBS·1972년) 할 때니 중학교 2, 3학년 때쯤이야. 원래 한 지붕 세 가족으로 주인집인 우리가 안방에 살고 건넛방 문간방은 세를 줬는데, 아버지 사업 실패로 집안이 망했어. 빚쟁이가 몰려오고 집이 넘어가 외할머니네로 들어가는데, 내줄 보증금이 없으니 문간방 세입자도 같이 이사 갔어. 그분들이 외할머니네 건넛방에 살고 우리가 문간방으로 들어갔지. 그때 내 방송국 수입이 생계에 도움이 됐으니 본의 아니게 소년가장 역할을 한 거지. 80년대 스타가 되면서 집안을 일으켰는데 집이 또 망했어. 집 2채하고 세간살이까지…번 돈을 한꺼번에 날렸어. 허무하더라고. 밖에선 화려한 스타로 아는데, 친구 집에서 몇 달 얹혀살았어. 다 그만두고 미국 뉴욕으로 가 3년 반을 지냈지.

생계를 위해 벼룩시장에서 시계를 팔았지?

500불에 중고 포드 스테이션 왜건을 샀는데, 옷이나 가방은 차에 많이 안 들어가도 시계는 작잖아. 브로드웨이 한국 도매상들에게서 떼어다 팔았지. 그때 스쿨오브비주얼아트 강의를 청강했는데, 학생들이 내는 단편영화 아이디어를 들어 보니 한국에선 몽땅 검열에 걸릴 것 같더라고. 내 머릿속에 자체 검열기관이 얼마나 강하게 자리 잡았는지 깨달았어. 돌아와서 오랜만에 한국 드라마를 보니 느낌이 북한 드라마 보는 거 같은 거야. 뉴욕에서 고정관념을 깨서 나중에 ‘난타’를 만들 수 있었던 거지.

‘난타’도 코로나19로 어려웠을 거 같은데….

PMC프러덕션 설립 이래 처음으로 2년 동안 60억 원쯤 적자를 봤지. 마침 대출 상환하려고 모아놨던 현금이 있어서 버틸 수 있었어. 이젠 거의 회복됐지.

● 3장 “필요한 건 망각뿐이지”(‘더 드레서’)

[로널드 하우드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 ‘더 드레서’는 1942년 독일군의 폭격이 이어지는 영국 런던에서 227번째 ‘리어왕’을 공연하는 노배우와 의상 담당 노먼의 이야기다.]

‘에쿠우스’의 앨런(1982년 백상예술대상 연기상) 같은 강렬한 배역이 그립진 않아?

열정은 있는데 체력이 안 돼. 올 5월 2인극 ‘웃음의 대학’ 할 땐 왼쪽 어금니가 아파서 진통제 먹어 가며 했어. 마지막 공연 끝나고 치과에 갔더니 치근까지 상했대서 결국 뺐어. 원래 치아가 굉장히 건강했는데… 공연할 때마다 어금니를 하나씩 뽑으면 앞으로 공연을 몇 개나 할 수 있을까(웃음).

작품을 직접 골랐지?

노인이 대개 단순한 인물로 그려지는데 ‘선생님’은 입체적이라 매력적이야. 다혈질로 사람들을 괴롭히는 인물로 보이지만 배우는 그럴 수 있다 싶어. 작품의 흐름이 깨지면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지. 무대 위에서 박수받고자 하는 갈망이 나와도 닮았지. 또 ‘난타’ 시절 내가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고 배우들이 그러더라고, 난 기억이 잘 안 나는데(웃음)…. 요즘은 이빨 빠진 호랑이라고 놀려.

올림픽 개·폐회식을 총감독했는데, 그래도 이루고 싶은 게 남았어?

과분했지. 고비를 잘 넘긴 건 분명해. 하지만 배우가 좋은 건 늙어도 노인을 연기할 수 있다는 거잖아? 분장실에서 죽은 ‘선생님’은 바라던 기사 작위도 못 받았고, ‘남은 게 아무것도 없다’며 허탈해하지만 굉장히 행복하게 간 거야. 셰익스피어 작품 주인공을 모두 연기했잖아. 나도 평생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았어. 노역 연기를 계속하다 간다면 그게 행복이겠지.

이번 연극에서 마음에 드는 대사를 꼽는다면….

“필요한 건 망각뿐이지.” 나도 내후년이 칠순인데, 누구나 잊고 싶고 후회되는 일이 있는 법 아니겠어. 대부분 인간관계지.

그래도 조정 능력이 대단했던 것 같아.

언제부턴가 ‘조금 손해 보면 인생이 편하다’ 싶었어. 평창 땐 SNS를 정말 많이 했어. 회의가 끝나면 아이디어가 채택되지 못한 이들에게 다 메시지를 보냈어. ‘정말 좋은데 예산이 안 된다’ ‘날씨 때문에 위험이 있다’…. 그러니 진척이 되더라고. 과거에 나도 연출자 말에 상처받았을 때 ‘전화 한 통 해줬더라면 마음이 풀렸을 텐데’ 싶었거든.

최근 신춘수 오디컴퍼니 대표의 ‘위대한 개츠비’가 토니상을 받았는데 기분이 묘했을 듯?

그런 욕심은 눈이 나빠지면서 내려놨어. 우리 ‘심청전’ 같은 게 브로드웨이에서 성공할 만한 아이템이라고 보거든. 공양미 삼백 석에 몸을 던진 뒤 용왕을 만나는 바닷속 이야기들이 얼마나 흥미진진하겠어. ‘언더 더 시’보다 나을걸. 만들 자신은 없고 그냥 생각만 해.

후배가 고민 상담을 해 오면 뭐라고 해?

“봄에 했던 고민이 뭐였는지 크리스마스 때 기억이 나던가!”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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