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5ㆍ18 성폭력 피해 폭로
공식 석상서 첫 실명 증언
어제(9월 30일)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5ㆍ18 성폭력 피해자 증언대회에서 발언을 하고 있는 최경숙씨. 〈사진=JTBC 보도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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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5ㆍ18 성폭력 피해 할머니들이 새벽 기차를 타고 서울에 왔습니다. 지팡이를 짚고 국회도서관 강당에 들어섰습니다. 어제(9월 30일) 열린 '5ㆍ18 성폭력 피해자 증언대회-용기와 응답'에 참석한 13명입니다. 성폭력 피해 증언자 모임 '열매'가 주관했습니다. 피해자들이 수백명 앞에서 이름과 얼굴을 드러내고 증언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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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현 검사 미투 보고"…증언대 선 피해자들
━5ㆍ18 성폭력 피해는 오랜 기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피해 직후엔 '폭도'로 매도될까 두려워 숨겼습니다. 5ㆍ18 민주화운동이 국가기념일로 제정된 것은 1997년의 일입니다. 시간이 흘러서도 '성폭력 피해자'라는 낙인이 무서워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수치심과 죄의식을 홀로 감당했습니다. 부부관계 등에 문제를 겪었고, 쫓기듯 결혼한 뒤 평생 우울증과 질병을 앓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국가 차원의 진상조사도 계엄군의 과잉진압과 헬기 사격 등에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계엄군에 구타당하는 시민. 1980년 당시 전남매일 사진기자로 활동했던 나경택 전 연합뉴스 광주전남취재본부장이 취재한 사진. 〈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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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시간 소외되어 온 성폭력 피해자들이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내게 된 계기는 서지현 검사의 '미투' 였다고 했습니다. 피해자 김선옥(66)씨는 “TV에서 서지현 검사를 보고 '내가 말하지 않으면 영원히 묻혀버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라고 했습니다. 피해자들은 이날 증언대회에서 당시 상황과 피해 사실을 매우 구체적으로 언급했습니다. 시민들은 눈물과 박수로 지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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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군 2명이 강간…뱃속 아이 잃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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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숙(71)씨도 미투 운동을 계기로 용기를 얻어 증언에 나섰다 했습니다. 1980년 5월 19일, 최씨는 27세였습니다. 뱃속에 셋째를 품은 4살 쌍둥이 형제 엄마였습니다. 운전을 잘해 지입차 일을 하며 돈을 벌었습니다. 그날도 일을 하고 아이를 데리러 시댁에 가던 길이었습니다. 계엄군이 “차를 세우지 않으면 불태워버릴 것”이라며 불러 세웠습니다. 차 안에서 군인 2명에게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속옷만 입은 시민들을 연행하고 있는 계엄군. 〈사진=5.18 기념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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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는 “당시 임신 3개월이었다. 하혈을 많이 했는데 조산원에 가보니 아이가 죽었는데 어떻게 하겠냐 물었다”라고 증언하며 울었습니다. "당시 군인의 땀 냄새, 입 냄새가 코끝에 생생해 평생 수시로 토했다"라며 눈물을 훔쳤습니다. 10년 동안 약을 먹었지만 낫지 않았고, 트라우마 치료를 받고서야 심리적 문제임을 깨달았다 했습니다.
얼룩무늬 군복만 봐도 어지럽고 무서웠습니다. 쌍둥이 아들에게도 "절대 군대에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두 아들은 의무경찰로 복무했습니다. 최씨는 '유산한 아이는 딸이었을까, 그랬다면 나의 이야기를 들어줬을까'. 아직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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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교사 꿈꾸던 전남대생…고문에 성폭행까지
━김선옥(66)씨는 음악 선생님을 꿈꾸던 대학생이었습니다.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비겁하다”라는 생각에 전남도청에 나가 저항하다 연행됐습니다. 졸업을 앞두고 미래를 생각할 때였습니다. “우리가 광주를 치유해야 한다. 학생 여러분이 나서서 솔선수범해달라”는 교수님의 말이 귓가에 울렸습니다.
〈사진=JTBC 보도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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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들어간 도청엔 시신 14~15구가 널려 있었습니다. 김씨는 “한쪽 얼굴에 총상을 입고 죽은 사람, 시체가 말라 있는 사람 등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군인이 광주 시민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운동권도 아니었지만 정의감이 불탔다”라고 기억했습니다.
김씨는 학생수습대책위원회에 소속돼 항쟁하는 시민들을 돕고, 외신기자들에게 실상을 알리는 일을 하다가 학교로 복귀했습니다. 교생실습을 하던 학교에서 체포돼 영창에 끌려갔습니다. 김씨는 “'여자 대빵'을 잡아온다며 다들 구경 나왔다. 데모도 안 하게 생겼는데 얼굴이 반반하게 생겼다는 등 조롱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1980년 5월 광주시민들이 합동 장례를 하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
3일 동안 잠 못 자고 맞다가 여관에 끌려가 수사관에게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교직 임용이 2년 동안 막혔고, 임용 뒤에도 '블랙리스트'로 감시당했습니다. 김 할머니는 평생 꿈을 꿨습니다. 머리가 반쪽 날아간 시신과, 흰 속옷 차림으로 내려다보던 가해자의 눈빛이 자주 나왔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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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폭력' 인정됐지만…보상 기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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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년이 지나 이들이 당한 피해는 '국가 폭력'으로 인정됐습니다. 진상조사가 이뤄졌습니다. 오랜 싸움 끝에 이뤄낸, 세계에 유례없는 성취였습니다. 그런데 그뿐이었습니다. 아직 제대로 된 사과도 받지 못했고, 국가 차원의 배상 기준도 모호합니다. 하주희 변호사는 “실제 성폭력 피해자에게 어떻게 배상을 할지 입법도 안 되어 있고, 관련 업무를 행정안전부와 광주광역시가 서로 미루고 있는 실정”이라고 했습니다.
30일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5.18 성폭력 피해자 증언대회에 참석한 피해자들. 〈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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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들은 그래서 한번 더 나섰다고 했습니다. 김선옥씨는 “나는 지금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지만 내가 쏘아 올린 공은 영원히 묻히지 않고 이 자리에 설 수 있도록 용기를 주었다”라고 했습니다. 김복희(63)씨는 “이런 불행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하기에 용기를 내어 봤지만 지금도 마음이 매우 아프다”라고 했습니다.
증언장에 온 시민들은 "나는 너다, 우리는 서로의 용기다"라고 외치며 피해자들을 응원했습니다. 김복희씨가 "이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 국가에 의해 생긴 일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떨쳐내기 위해 치열하게 살았다. 정말 열심히 살았다"라고 울먹이자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피해자들은 “여기 못 나온 분들도 우리를 보고 위안을 얻었으면 좋겠다”라고 했습니다.
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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