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AFPBBNews=뉴스1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미국 16대 대통령(1861년 3월~1865년 4월) 에이브러햄 링컨은 '실패의 아이콘'으로 불린다. 그의 생애는 수많은 실패와 상실로 점철됐다.
링컨의 인생은 아버지의 실패와 함께 시작했다. 켄터키주 부농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링컨이 태어난(1809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파산하고 인디애나주로 거처를 옮겼다. 9살에 어머니를 여읜 링컨은 이후 아버지의 재혼으로 식구가 늘면서 어릴 때부터 생활고에 시달렸다. 링컨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농사와 노동을 강요하며 생계를 책임지게 했다.
어머니를 잃은 지 10년 뒤 링컨은 친누나마저 먼저 떠나보냈다. 이후 1829년 멕시코와 국경분쟁에 참전하며 군인으로 복무했다. 전역 후 그의 20대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20대 초반 첫 번째 사업에 실패하고 다음 해 치른 1832년 일리노이주 의원 선거에 나섰지만 13명 중 8위로 낙선했다. 이듬해 두 번째 사업에 실패했고 이때 생긴 빚을 갚는 데만 17년이 걸렸다고 한다.
링컨은 빚을 갚기 위해 잡화점 판매원, 선원, 측량기사, 프로레슬러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이중 선원으로 일한 경험은 그가 훗날 '특허 대통령'이 되는 계기가 됐다. 배에서 잡역부로 일했던 그는 배가 자주 모래톱에 걸려 움직이지 않자 이를 해결하는 장치를 고안해 특허(특허번호 6469호)를 받았다. 링컨은 특허에 대한 관심을 살려 변호사 시절 특허법 관련 소송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대통령이 된 뒤에는 특허 시스템을 정비해 미국이 세계 1위 산업 강국으로 부상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834년 그의 나이 25세 때, 링컨은 인생의 첫 성공을 맛봤다. 일리노이 주의원으로 선출되며 정치에 입문했다. 기쁨도 잠시 같은 해 약혼자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링컨은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시달렸다. 이 와중에 1841년까지 4선 주의원 활동을 계속했고 그 사이 독학으로 준비하던 변호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이후 주의회 대변인, 대통령 선거인단, 하원 의원 공천 등에 도전했으나 실패를 거듭하다 1847년에 연방 하원의원으로 당선됐다. 하지만 미국-멕시코 전쟁에 반대했다가 인기가 떨어지면서 하원의원직은 1기로 끝났다.
미국 워싱턴 DC의 링컨 기념관 /사진=게티이미지뱅크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변호사로 돌아갔던 그는 1850년대 노예제가 전국적인 문제로 고조되자 정계 복귀를 결심했다. 하지만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서 두 차례 낙선하고 부통령 후보 경선에서도 한 차례 낙선했다. 선거에서는 패했지만 변호사로 일하며 쌓은 화술로 이름을 알렸다. 특히 1858년 상원의원 선거 당시 유명 정치인이던 스티븐 A. 더글러스와 노예 문제를 두고 치열한 논쟁을 벌여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여세를 몰아 결국 1860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고 이듬해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링컨이 대통령이 되자 노예제 폐지를 반대하는 남부 7개 주가 미국 연방에서 이탈해 '남부 연합'을 세웠다. 그해 4월 남부 연합이 연방군의 요새를 공격하며 남북전쟁이 시작됐다.
이때 링컨은 남북전쟁의 성패를 가를 2가지 결정을 내렸다. 1862년 홈스테드 법(자영농지법)과 1863년 노예해방선언이다. 홈스테드 법은 5년간 일정한 땅을 개간하려는 시민에게 160에이커의 토지를 보장했다. 링컨이 어릴 적부터 농장 일을 하고 작은 농장주로서 생활하며 얻은 소농 중시 관점에서 비롯된 정책이었다. 이 정책은 서부 개척지에 대한 자영농의 정착을 촉진하며 서부의 지지를 얻었다. 이듬해 노예해방선언을 발표하며 남부에서 탈출한 노예들이 북군에 가담했다. 결국 전세가 강화된 북부가 승리하며 미국은 다시 통일됐다.
링컨은 재선에도 성공했지만 두 번째 임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865년 4월14일, 연극을 보러 극장에 갔다가 남부의 부활을 꿈꾼 배우에 의해 암살당했다.
생전 링컨은 두 번의 사업 실패와 10번의 선거 중 7번 좌절을 경험했다. 어머니·누이·약혼녀에 이어 네 아들 중 세 아들마저 먼저 보내는 상실도 겪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실패를 원동력 삼아 계속 도전했고 결국 미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이름을 남겼다.
이영민 기자 letswin@mt.co.kr
ⓒ 머니투데이 & mt.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