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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5 (수)

[사설]“수업 안 들어도 시험 치면 진급”… 끝없는 땜질 처방의 귀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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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대학교 개강일인 9월 2일 오후 서울 시내의 한 의과대학 해부학 실습실이 텅 비어있다. 이한결 기자 alway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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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대 의대를 포함한 일부 의대들이 증원에 반발해 수업 거부 중인 의대생들에게 ‘수업 안 들어도 시험만 보면 진급 가능하다’고 공지해 논란이다. 의대는 원래 한 과목이라도 낙제하면 전체 학년을 다시 다녀야 할 정도로 학사 운영이 엄격하다. 그런데 교육교부금 지급 권한을 쥔 교육부가 ‘집단 유급은 안 된다’고 압박하자 한시적 특혜를 허용하는 고육책을 내놓은 것이다.

교육부가 전국 40개 의대에 유급 불가 원칙을 밝힌 건 올 7월이다. 의대생들의 1학기 수업 거부로 유급이 확실시되자 유급 판단 시기를 학년말로 미루고, F학점을 받아도 유급시키지 않는 내용의 ‘의대 학사 탄력운영 가이드라인’을 내놓았다. 집단 유급 시 당장 내년부터 3000명 규모인 의사 배출이 끊기고, 1학년의 경우 증원되는 신입생까지 7500명이 6년간 한꺼번에 수업을 받아야 하는 사태를 감안한 조치였다.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했을 때 상식적인 정부라면 미리 준비해 둔 ‘플랜B’를 시행하거나 현실적인 여건을 감안해 정책을 재조정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무조건 증원 정책을 고수하다 보니 ‘수업 안 들어도 진급’이라는 황당한 대책까지 내놓게 된 것이다.

정부의 잇단 구제책에도 전국 의대의 2학기 등록률은 3.4%에 그치는 등 학사 파행은 이어지고 있다. 이대로 내년이 되면 상황은 더욱 악화될 전망이다. 의대 증원 정책이 바뀌지 않는 한 의대 증원에 반대하며 학교를 이탈한 학생들이 복귀한다는 보장이 없을뿐더러 신입생들도 열악한 교육 여건에 항의하며 선배들의 수업 거부에 동참할 가능성이 크다. 정원이 늘지 않아 상대적으로 교육 여건이 나은 수도권 의대 진학을 노리고 휴학 후 재수를 택하는 학생들도 늘어날 것이다. 내년에도 1학년생들이 집단 유급되면 그때 의대 교육은 어떻게 되겠나.

당장 겪고 있는 의료 공백도 문제지만 의대 교육의 파행은 장기적으로 의료 체계에 회복하기 어려운 후유증을 남길 것이다. 의대 증원은 의료의 질 개선을 위한 정책 수단임에도 의대 증원 자체가 목적이 되다 보니 의료의 질은 나빠지고 의사 양성 체계의 근간도 흔들리고 있다. 치명적인 본말의 전도를 언제까지 고집할 텐가. 이제라도 의대생들이 집단 유급되는 사태를 가정해 군의관과 공중보건의를 비롯한 의료 인력 수급 차질과 의대 수업 대란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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