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진 기자(hjkim@pressian.com)]
이번 주 레바논을 흔든 동시다발 무선호출기(삐삐)·휴대용 무전기(워키토키) 폭발의 배후로 지목된 이스라엘이 19일(이하 현지시간) 레바논 남부에 대규모 공습을 가하며 공세를 확대해 전면전 위험을 키웠다. 레바논 무장 정파 헤즈볼라 수장 하산 나스랄라는 호출기 폭발 공격이 "선전포고"라며 보복을 예고했다. 서방은 확전 자제를 촉구했다.
이스라엘 매체 <타임스오브이스라엘>에 따르면 이스라엘군은 19일 자국 공군이 전투기를 동원해 이스라엘 영토를 향해 발사할 준비가 돼 있던 레바논 남부에 위치한 로켓 발사대 100대 가량을 공습했다고 밝혔다. 이스라엘군은 이 공격으로 헤즈볼라 소유 건물과 무기고 또한 타격했으며 "군이 헤즈볼라 테러 조직의 테러 능력과 군사 기반시설을 지속적으로 파괴하고 있다"고 밝혔다.
<로이터> 통신은 레바논 국영 NNA 통신을 인용해 이날 오후 9시 이후 레바논 남부에 52회 이상의 폭격이 가해졌다고 보도했다. 통신은 3명의 레바논 보안 소식통이 이번 공습이 지난해 10월 이스라엘과 레바논 사이 교전이 시작된 뒤 가장 규모가 컸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지난해 10월7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가 이스라엘 남부를 습격해 1200명을 죽이고 250명을 납치한 뒤 헤즈볼라도 하마스 지원 명목으로 이스라엘 접경 지역 공격을 시작해 11개월 째 제한적 교전 중이다.
이번 공습은 17~18일 레바논 전역에서 일어난 호출기·무전기 폭발에 이어 일어나 확전 경계감을 키웠다. 수천 건의 연쇄 폭발로 이틀간 레바논에서 37명이 숨지고 3000명 이상이 다쳤다. 폭파 배후로 지목된 이스라엘은 관련해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호출기는 휴대전화를 통한 위치 추적을 피하기 위한 헤즈볼라 조직원들의 주요 통신 수단으로 이용됐지만 전장이 아닌 식품점, 거리 등에서 무차별적으로 폭발이 일어나며 어린이, 의료 종사자 등도 휩쓸려 사망했다.
헤즈볼라는 호출기 폭파를 "선전포고"로 보고 보복을 다짐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스카이뉴스 방송을 보면 19일 이스라엘 공습 몇 시간 전에 호출기 폭발에 관한 연설을 행한 나스랄라는 해당 공격에서 이스라엘이 "모든 규칙, 법, 금지선(레드라인)을 넘었다"며 공격을 "전쟁 범죄 혹은 선전포고"로 규정하고 구체적 시기와 방법은 언급하지 않은 채 이스라엘에 대한 "엄중한 심판과 꼭 맞는 처벌"을 예고했다.
나스랄라는 이날 연설에서 헤즈볼라가 "전례 없이 중대한 안보 및 군사적 타격을 받았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적의 기술 수준이 우위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렇지 않다고 말한 적 없다"며 해당 공격이 조직에 심각한 피해를 입히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 헤즈볼라의 수장 하산 나스랄라가 19일(현지시각) 헤즈볼라의 알-마나르TV에 출연해 연설을 가졌다. ⓒAFP=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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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7만 명에 달하는 레바논 접경 지대 주민들의 귀환을 최근 전쟁 목표에 편입시키고 레바논 공세를 강화하고 있지만 나스랄라는 "가자지구 주민에 대한 침략"을 멈추지 않는 한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나스랄라는 이스라엘을 향해 가자지구 전쟁 휴전이 없는 한 "군사적 확전, 살인, 전면전도 너희 정착민과 주민들을 다시 국경 지대로 돌려 놓을 수 없다"고 못박았다.
외신은 이날 나스랄라의 연설 중에도 이스라엘이 베이루트에 전투기를 띄워 무력 시위를 벌였다고 전했다. <AP>는 이스라엘 전투기가 베이루트 상공을 저공 비행하며 음속 폭음(소닉붐)을 내뿜어 주민들이 창문이 깨질 것을 우려해 재빨리 창을 열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지난 7월 하마스 정치국 수장 이스마일 하니예가 자국 영토에서 살해되는 굴욕을 맛본 뒤 이스라엘에 대한 보복을 천명한 이란 또한 대응을 예고했다. 이란 <IRNA> 통신은 호세인 살라미 이란 이슬람혁명수비대(IRGC) 사령관이 나스랄라에게 이스라엘이 "곧 '저항의 축'으로부터 압도적 반격을 받을 것"이라는 서한을 보냈다고 보도했다. 저항의 축엔 반미·반이스라엘을 내세우는 헤즈볼라, 예멘 후티 반군, 하마스 등 이란의 지원을 받는 중동의 여러 무장 단체가 포함된다.
다만 헤즈볼라의 실제 보복 역량에 대해선 의견이 엇갈린다. 지난 7월 베이루트에서 일어난 이스라엘의 고위 사령관 암살에도 유효한 대응을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데다 이번 호출기 폭발로 통신 체계에도 문제가 생겼고 수천 건의 폭발로 인한 부상자도 상당할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전문가들은 통신 기기 폭발이 헤즈볼라에 심리적 타격 외에 실질적 영향을 미치진 못했을 것으로 본다. 나스랄라는 헤즈볼라 전투원이 10만 명 이상이라고 주장 중이다. 전문가들은 3~5만 명 가량으로 추정한다.
또 19일 <AP> 통신은 헤즈볼라와 가까운 레바논 분석가 카심 카시르가 폭발이 전투원이나 보안 관리가 아닌 헤즈볼라와 연계돼 일하는 민간 노동자들에 주로 피해를 입혔기 때문에 전투에 미치는 영향이 줄었다고 설명했다고 전했다.
호출기 폭발로 인한 통신 중단은 문제지만 레바논군 퇴역 장군인 엘리아스 한나는 <AP>에 헤즈볼라가 기기를 사용하지 않고 우편 등 사람을 통한 소통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는 가자지구에 숨은 하마스 지도자 야히아 신와르가 이스라엘 추적에 잡히지 않는 것도 이러한 통신 방법 덕분이라고 덧붙였다.
헤즈볼라는 호출기와 무전기 폭발 뒤인 19일에도 이스라엘 북부를 향해 미사일과 무인기(드론) 공격을 가해 이스라엘군 2명이 사망했다고 <타임스오브이스라엘>이 보도했다.
서방은 확전 자제를 촉구했다. 프랑스 파리를 방문 중인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19일 "(가자지구 전쟁 휴전을) 더 어렵게 하는 어떤 확전 행위도 보고 싶지 않다"며 "중동 전반과 특히 레바논에 관해 자제 및 긴장 완화를 촉구한다"고 밝혔다.
같은 날 데이비드 라미 영국 외무장관도 이스라엘과 헤즈볼라에 "즉각적 휴전"을 촉구했다. 그는 언론에 이스라엘과 레바논 피난민 모두를 집으로 돌려 보낼 "정치적 합의"를 원한다고 강조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19일 레바논인을 향한 영상 연설을 소셜미디어(SNS)에 게재해 "외교적 경로가 존재한다"며 "전쟁을 피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헤즈볼라 간 분쟁의 명목이자 열쇠인 가자지구 전쟁 휴전은 미국 대선 이후로 미뤄질 수 있다는 암울한 전망이 나온다. 19일 미 경제전문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 백악관, 국무부, 국방부의 여러 고위 당국자들이 조 바이든 미 대통령 임기 중 휴전 협상이 타결될 것이라는 기대를 버렸다고 보도했다.
이 당국자들은 인질과 교환해 석방할 팔레스타인인 수감자 비율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호출기·무전기 폭발 공격과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습이 전면전 가능성을 높이며 하마스와의 외교를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에 더해 바이든 정부 당국자들이 하마스가 자신들이 제시한 조건을 미국과 이스라엘이 수용한 뒤에도 협상을 받아들인다는 확답을 하지 않아 협상가들을 좌절시키고 있다고 전했다고 덧붙였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역시 정권 유지를 위해 협상 과정을 방해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신문은 한 미국 당국자가 "어떤 협상 타결도 임박하지 않았다. 타결될지 확신도 없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한 아랍 국가 당국자는 <월스트리트저널>에 "지금은 그런 일(협상 타결)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다"며 "모두가 선거(미국 대선)가 끝날 때까지 관망 중"이라고 말했다.
[김효진 기자(hjkim@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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