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발 후 남은 무선호출기 잔해. [사진=X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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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28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레바논 무장단체 헤즈볼라의 무선호출기(beeper·한국의 일명 삐삐) 폭발사건은 이스라엘이 사전 설치한 폭발물 때문이라고 외신들은 보도했다.
뉴욕타임스(NYT)는 17일(현지시간) 미국과 서방국가 당국자를 인용해 이스라엘이 이번 폭발사건의 배후라고 전했다. 당국자들에 따르면 폭발한 무선호출기는 헤즈볼라가 대만 골드아폴로사에 주문해 납품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 호출기의 배터리 옆에 1~2온스(28~56g)의 폭발물이 들어가 있었으며 이를 원격으로 터뜨릴 수 있는 스위치도 내장됐다고 한다. 또 살상력을 높이기 위해 폭발 직전 수초간 신호음을 내게 하는 프로그램까지 설치됐다고 당국자들은 말했다.
헤즈볼라 당국자들에 따르면 폭발 직전 호출기에는 헤즈볼라 지도부가 보낸 메시지로 보이는 알림이 떴다고 한다. 그러나 이 알림은 지도부의 메시지가 아닌 폭발을 활성화하는 신호였고, 곧이어 호출기가 폭발했다.
실제 온라인에 올라온 영상과 외신이 전한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폭발은 가방이나 주머니에 있던 호출기에서 알림음이 난 뒤 피해자들이 호출기 화면에 뜬 내용을 확인하는 도중에 일어났다.
앞서 헤즈볼라는 지난해 10월 가자 전쟁 발발 이후 도청이나 위치 추적을 피할 목적으로 무선호출기 사용을 늘렸다. 이와 관련해 헤즈볼라 최고지도자 하산 나스랄라는 지난 2월 이스라엘의 표적 공격에 활용될 수 있는 휴대전화 사용 금지 및 폐기를 경고했다. 이런 상황에서 헤즈볼라는 대만 골드아폴로사에 무선호출기 5000대를 주문했고, 이를 레바논 전역의 조직원들에게 배포했다. 일부는 이란과 시리아 등 동맹국에도 전달됐다.
이에 대해 대만 골드아폴로사 측은 폭발에 사용된 호출기는 자신들이 제조한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 로이터와 미국 CNN 등에 따르면 회사 측은 이날 성명에서 폭발한 호출기는 자사 생산 제품이 아니고, 골드아폴로사와 상표권 계약을 맺은 유럽의 유통사가 생산·판매한 것이라고 밝혔다. 회사 창립자인 쉬칭광 회장도 이날 기자들에게 “그 제품은 우리 것이 아니며 그저 우리 상표만 붙이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유럽의 유통사인 BAC가 상표권 계약을 맺고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생산했다고 설명한 뒤 추가 질문이 이어지자 자리를 피했다. 대만 경제부도 대만에서 레바논으로 호출기를 직접 수출한 기록이 없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레바논의 고위 소식통은 “(이스라엘 해외 정보기관인) 모사드가 생산 단계에서 기판을 개조했기 때문에 이번 소행을 탐지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 설명대로라면 모사드가 아예 호출기 제조 공장에 침투해 폭발물과 기폭장치를 심었을 수 있다.
첩보영화를 방불케 하는 이번 사건으로 과거 이스라엘 정보당국의 비밀작전 수법이 또다시 주목받고 있다. 모사드는 암살 작전 등을 수행하기 위해 수십여 년 전부터 통신수단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왔다.
1972년 뮌헨 올림픽 직후 프랑스 파리에 주재했던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간부 마흐무드 함샤리 암살에는 유선전화가 동원됐다. 이스라엘 선수단 11명에 대한 보복에 나선 이스라엘이 함샤리 자택의 전화기에 폭탄을 설치한 것이다. 96년 이스라엘 국내 정보기관 신베트가 꾸민 하마스의 사제폭발물 기술자인 야히아 아야시 암살에는 휴대전화가 사용됐다. 아야시는 이스라엘에 포섭된 팔레스타인인이 건넨 휴대전화를 사용하던 중 폭발로 목숨을 잃었다.
박현준·한지혜 기자 park.hyeon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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