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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9 (목)

첩보영화 방불케한 '삐삐' 폭발 공격…중동 정세 '점입가경'(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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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즈볼라 사용 호출기 폭발로 3000명 사상

도청·위치추적 피하려 휴대전화 대신 사용

"대만회사 제품…이스라엘이 폭발물 심어"

일상 통신수단 무기로 돌변…방첩 치명타

[이데일리 이소현 기자] 레바논 전역에서 첩보영화를 방불케 하는 호출기 폭발 공격이 벌어지며 중동 지역에 또다시 전운이 드리우고 있다. 역사상 가장 큰 방첩 실패라는 오점을 남긴 친이란 무장단체 헤즈볼라는 배후로 이스라엘을 지목, 보복을 다짐했다. 가자전쟁 발발 후 약 1년간 무력 공방을 이어온 양측이 전면전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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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현지시간)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무선 호출기가 폭발해 약 3000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한 가운데 한 사람이 아메리칸대학 베이루트 메디컬 센터(AUBMC) 밖에서 들것에 실려 나가고 있다. (사진=로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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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한 헤즈볼라 삐삐…“배후는 이스라엘”

17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등 전국 각지에서 헤즈볼라의 호출기 수백 개가 폭발해 최소 9명이 숨지고 2750명이 다치는 등 3000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당시 호출기가 경고음을 울렸고, 호출기 화면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폭발이 이어져 피해자 상당수가 손이나 얼굴, 복부, 허벅지를 심각하게 다친 것으로 파악됐다.

폭발된 기기는 국내에서 ‘삐삐’로 불렸던 무선통신기로 호출음이나 단문 메시지 수신용이다. 헤즈볼라는 지난 2월 이스라엘의 도청과 위치추적 등을 우려해 스마트폰과 같은 휴대전화 사용을 자제하며, 호출기 사용을 늘렸다.

이번 호출기 폭발을 놓고 주요 외신에선 2가지 방법론이 제기됐다. 호출기에 악성코드를 심어 배터리를 과열시킨 뒤 폭발을 유도하는 ‘사이버 공격’과 호출기 선적물을 중간에 가로채 장치 내부에 소량의 폭발물을 삽입하는 ‘공급망 공격’이라는 주장으로 나뉜다.

우선 공급망 공격이 더 유력하다고 보는 시각이 현재로선 더 많은 상황이다. 미국 등 정부 관계자들은 뉴욕타임스(NYT)에 “이스라엘이 헤즈볼라가 수입한 대만 기업의 호출기에 소량의 폭발물을 심었다”고 말했다. 헤즈볼라가 대량으로 호출기를 주문하자 이스라엘 정보당국이 이를 역이용해 공격 수단으로 삼았다는 주장이다. 이스라엘의 해외 정보기관인 모사드는 암살 등 작전 수행을 위해 50여년 전부터 전화 등 통신수단을 적극적으로 사용해왔다.

폭발한 호출기는 헤즈볼라가 대만 ‘골드아폴로’에 5000대를 주문해 납품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대부분 AR924 기종으로 각 기기의 배터리 옆에 1~2온스(28~56g)의 폭발물이 들어가 있었으며 이를 원격으로 터뜨릴 수 있는 스위치도 함께 내장된 것으로 전해졌다. 또 호출기가 폭발 직전 수초간 신호음을 내게 하는 프로그램까지 설치했다는 게 당국자들의 전언이다.

그러나 골드아폴로 측은 폭발에 사용된 호출기는 자사 생산 제품이 아니라고 밝혔다. 쉬칭광 설립자는 로이터에 “골드아폴로 역시 이 사고의 피해자”라며 상표권 계약을 맺은 유럽의 유통사가 생산·판매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만 경제부도 대만에서 호출기가 레바논으로 직접 수출된 기록이 없다고 밝혔다.

반면 통신 장비 해킹 경력이 있는 이스라엘 전직 관리는 파이낸셜타임스(FT)에 폭발 규모가 작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사이버 공격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그는 “하나의 장치에 원격으로 (배터리 과열을) 실행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가능하지만, 실제 폭발할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며 “수백 개의 호출기에 동시에 적용하는 것은 매우 복잡하고 정교한 술을 요구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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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골드 아폴로의 쉬칭광(왼쪽) 대표가 18일(현지시간) 헤즈볼라 대원들이 사용하는 무선호출기를 납품했다는 보도를 부인하며 회사 사무실 밖에서 언론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AF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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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즈볼라 치명타…전면전 위기 고조

헤즈볼라는 즉각 이스라엘을 배후로 지목하고 보복을 경고했다. 헤즈볼라는 성명에서 “이스라엘에 전적인 책임을 묻는다”며 “반드시 정당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스라엘은 이번 공격에 대해 인정하지도 부인하지도 않고 있다. 지난 4월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에 있는 이란 대사관에 대한 공격과 7월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하마스 고위 관리 암살건처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지만, 미국과 주요 서방국에는 이번 사건에 대한 정보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공격 방법론과 별개로 헤즈볼라는 조직 운영 능력에 치명타를 입게 됐다. 미사일이 오가는 국경 전투 지역이 아니라 조직원이 일상적으로 갖고 있던 무선호출기가 ‘치명적인 무기’로 변한 터라 이에 대한 심리적 충격과 사기 저하는 불가피하다. 시가전 중심으로 이뤄졌던 가자지구 전쟁에서 새로운 군사 기술 사용으로 기존 국제 규칙과 풍경을 바꾸는 모습도 보인다.

지역 안보 전문가인 아메르 알사바일레 교수는 NYT에 “이스라엘이 헤즈볼라의 전투원뿐 아니라 헤즈볼라와 연관이 있는 모든 이들을 일상에서도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헤즈볼라에 심리적 타격을 입혔을 것”이라며 “헤즈볼라의 모든 구역에서 작전을 수행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이번 공격으로 이스라엘과 헤즈볼라가 전면전으로 번질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앞서 이스라엘 총리실은 이날 성명을 내고, 밤사이 전쟁 내각 안보회의를 통해 레바논 접경지역인 이스라엘 북부 주민의 안전한 귀환을 전쟁 목표에 공식적으로 추가했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이스라엘의 전쟁 목표 확대 결정을 일종의 의도 표명으로 보고 있다고 FT는 전했다. 이는 이스라엘군의 우선순위 변화를 보여주는 신호로, 헤즈볼라와 이스라엘 간 충돌이 전면전으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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