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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전 직업은 '사형집행 두번' 한 보안관 [대통령의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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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22대·24대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

[편집자주] 대통령의 '전직'은 중요합니다. 그들의 정치 성향과 정책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대통령 후보를 소개할 때 그들의 전직을 내세우는 이유입니다.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은 '검사' 해리스와 '범죄자' 트럼프라는 구도를 만들었습니다. 공화당은 트럼프를 '성공한 사업가'로, 해리스를 '존재감 없는 부통령'으로 그립니다. 두 후보의 전직은 미국의 미래에 어떤 결과로 나타날까요. 대통령의 전직이 미국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앞선 미국 대통령들의 삶을 통해 돌아봅니다.

머니투데이

미국 22대, 24대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 /사진=미국 백악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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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팔로의 사형 집행인, 거부권 시장(The Veto Mayor), 소신 있는 원칙주의자, 착한 그로버(Grover the Good) 등. 미국 대통령 중 유일하게 '징검다리 임기'를 보낸 22대, 24대 대통령(1885년 3월~1889년 3월, 1893년 3월~1897년 3월)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별명 부자다. '거인 아저씨'나 '거대한 스티브'처럼 큰 몸집에서 비롯된 별명도 있지만 대다수 별명은 법과 원칙을 중시하는 그의 성향에서 유래했다. 이러한 성향은 그가 대통령이 되기 전 거친 여러 직업을 통해 드러나고 더 강화되기도 했다.

클리블랜드의 꿈은 변호사였다. 하지만 꿈으로 향하는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1837년 장로교 성직자의 아홉 자녀 중 다섯째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16세 때부터 늘 가난과 싸워야 했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좋아했지만 생계를 위해 학업을 포기하고 잡화점 점원, 맹인학교 교사로 일했다. 바쁜 와중에 변호사가 되겠단 꿈을 포기하지 않은 그는 대학에 입학하지 않고 독학으로 공부해 1859년 변호사가 됐다.

변호사가 됐지만 어머니와 동생들을 부양하기엔 수입이 부족했다. 결국 다른 일자리도 알아보던 그는 부지방검사로 재직했으며 1870년 뉴욕주 에리 카운티 보안관으로 선출됐다. 그는 보안관으로 일하며 사형 집행을 두 차례 주관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훗날 공화당 정적들은 그를 '버팔로의 사형 집행인'이라고 불렀다.

클리블랜드는 1881년 44세 나이로 민주당에 입당하며 정계에 입문했다. 그해 "공공의 신뢰를 받는 공공기관"을 핵심 가치로 내걸고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버팔로 시장에 당선됐다. 2년 뒤에는 뉴욕 주지사에 당선됐다. 시장과 주지사 시절 그는 공직사회 부패를 척결하고 주정부 개혁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500개가 넘는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해 '거부권 시장'이란 별명을 얻었다.

'소신 있는 원칙주의자' 이미지로 인기를 얻은 클리블랜드는 뉴욕 주지사가 된 지 1년여밖에 되지 않은 1884년 민주당 대선 후보로 지명됐다. 민주당과 공화당 개혁 세력의 공동 지원을 받은 그는 미국 남북전쟁 이후 최초의 민주당 출신 대통령이 됐다.

대통령이 된 뒤에도 그의 원칙주의, 법치주의는 계속됐다. 1887년 가뭄 피해 농가에 곡물 종자를 지원하기 위해 1만 달러를 지출하는 예산안에 거부권을 행사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당시 그는 "연방 정부가 사적인 구호 활동에 개입하면 국민은 정부로부터 과도한 보호를 기대하게 되고 우리의 국민성인 강인함을 약화하게 된다"며 "정부의 역할은 엄격히 헌법에 따라 제한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혁가적 성향도 이어졌다. 클리블랜드는 버팔로 시장과 뉴욕 주지사 시절 개혁 경험을 바탕으로 연방 정부에서도 부패와의 전쟁을 이어갔다. 행정부를 효율적으로 조직하고 공직사회 부패를 일소한 점은 그의 중요한 업적 중 하나로 평가된다.

1888년 재선에 도전한 클리블랜드는 공화당 후보 벤저민 해리스에게 선거인단 수에서 뒤지는 바람에 대통령 자리를 내줬다. 이후 4년 동안 뉴욕에 법률사무소를 열고 변호사로 지내며 백악관 탈환을 준비했다. 1892년 민주당 후보로 지명돼 재선에 성공하며 미국에서 유일하게 비연속적으로 두 번 임기를 수행한 대통령이 됐다. 하지만 두 번째 임기에서는 경제 공황과 사회적 불안으로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그는 개인의 경제적 책임감을 강조하며 정부 지출을 줄였는데 이러한 긴축 정책이 불황에 기여했다고 비판받기도 했다.

이영민 기자 letswi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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