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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8 (수)

[K-VIBE] 건축가 김원의 세상 이야기 ⑩ 우중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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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2024년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팬은 약 2억2천5백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이에 연합뉴스 K컬처 팀은 독자 제위께 새로운 시선의 한국 문화와 K컬처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K컬처팀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김원 건축환경연구소 광장 대표. 독립기념관·코엑스·태백산맥기념관 등 설계.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삼성문화재단 이사, 서울환경영화제 조직위원장 등 역임

연합뉴스

김원 건축가
건축환경연구소 광장 제공



어느 날 낮에 잠시 비가 엄청나게 왔다.

이런 걸 장대비라고 한다던가?

고속도로에서 시속을 30킬로로 줄이고 와이퍼를 가장 빠른 속도로 틀었는데도 앞창을 때리는 굵은 빗줄기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를 않았다. 그러기를 한 삼십 분을 하고 나니까 서서히 빗줄기가 빗방울로 변하면서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오는 듯 하늘이 밝아지고 시야가 트이기 시작했다.

그 비가 거의 그치고 다음에 내리는 비는 안개비라고나 할까 봐 방울이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그냥 뿌옇게 눈 앞을 가리는 안개 같은 비가 왔다.

분무기로 물을 뿌리는 것 같다.

나는 가습기 앞에 얼굴을 대고 있는 것 같다고 봤다.

그런데 갑자기 그 분무기와 가습기의 비유가 비를 묘사하는 데는 너무도 무미건조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함초롬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함초롬하다'는 말의 뜻은 국어사전에 '가지런하고 곱다'라고 나와 있다.

비가 그치고 분무기처럼 내린 이 비는 말하자면 마치 마당에 활짝 핀 수국에 이슬이 맺히는 느낌이다. 물방울이 달려 있을 때 수국이 '함초롬이 피어 있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말은 비보다는 꽃을 묘사하는 말이고, 이런 비를 더 정확히 표현할 다른 말이 없을까?

그때 금방 대답을 못 해서 우리말의 비 이름에 대해 공부를 했다.

안개처럼 눈에 보이지 않게 내리는 비를 '안개비'라고 한다. 안개처럼 보이면서 안개보다 조금 굵은 비를 '는개'라고 한다는 것은 이번에 공부하면서 알게 됐다.

늘어진 안개보다 더 늘어져서 '는개'다. 는개보다 조금 굵게 내리는 비가 '이슬비'다.

비의 알맹이가 보슬보슬 끊어지면서 내리는 비는 '보슬비'라고 한다. 보슬비보다 조금 굵게 내리는 비를 '부슬비'라 한다는 점도 새로 알게 된 사실이다.

가루처럼 포슬포슬 내리는 비는 '가루비', 가늘고 잘게 내리는 비는 '잔비'. 실을 드리운 듯 가늘게, 길게, 금을 그으면서 내리는 비를 부르는 '실비'라는 말도 있다.

보슬비와 이슬비를 섞어 놓은 듯 보슬보슬 내리며 는개보다 굵은 비는 가늘게 내린다고 '가랑비'라고 한다.

또 싸라기처럼 포슬포슬 내리는 비가 '싸락비', 놋 날(돗자리를 칠 때 날실로 쓰는 노끈)처럼 가늘게 비끼며 내리는 비를 '날비'라고 한다.

오랜 가뭄 끝에 조금 내리다 마는 비는 '먼지잼'이다. 풀풀 날리는 먼지나 겨우 재웠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보일 듯 말듯 가늘게 내리는 비에 관련한 우리말 명칭과 설명을 모두 읊어 봤다.

'가늘게'라고밖에는 무어라 더 표현할 줄 몰랐던 '가는비'의 종류만도 이렇게 많은 줄을 몰랐던 것이 부끄러워졌다.

그러면 다시 그날에 만났던 비에 대해 말하자면, 그건 나에게는 '안개비'라고 느껴졌다. 안개처럼 눈앞이 뿌연 것이 비와 안개가 반반쯤 섞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는 마치 안개의 부드러움처럼 비가 그렇게 부드럽게 느껴진 게 처음인 것 같았다. 하여튼 그것은 우리말로 표현할 수 있는 비의 묘사 가운데 가장 가볍고 부드러운 비라고 느껴졌다.

우리나라처럼 쌀농사에 의지해 살면서 천수답이 많고 하늘을 바라보며 비를 기다려야 하는 일에 도통한 민족이기에 우리는 '비'(雨)에 관한 그 명칭과 묘사가 극진하다.

마치 사시사철을 눈 속에서 사는 에스키모족이 '눈'(雪)에다가 이름 붙인 것이 60가지가 넘는다는 이야기와 같다.

비의 굵기와 관련해서는 '가는비'의 이름이 위에 열거한 바와 같고 '굵은비' 이름이 또 한참 숨 가쁘게 계속된다.

비와 관련된 우리말은 발비(빗발이 보이도록 굵게 내리는 비), 작달비(굵고 세차게 퍼붓는 비), 장대비(장대처럼 굵은 빗줄기로 세차게 쏟아지는 비), 주룩비(주룩주룩 장대처럼 쏟아지는 비), 달구비(땅을 다질 때 쓰는 쇳덩이나 둥근나무를 달구라 하듯이 달구질로 땅을 짓누르듯 내리는 거센 비), 채찍비(굵고 세차게 내리치는 비), 바람비(비바람이 불면서 내리는 비), 억수(물을 퍼붓듯이 세차게 내리는 비, 악수라고도 함), 모다깃비(뭇매를 치듯이 세차게 내리는 비), 우레비(우레가 치면서 내리는 큰비), 큰비(홍수를 일으킬 만큼 많이 내리는 비), 비므슬(홍수의 옛말), 개부심(장마 끝에 한동안 쉬었다가 몰아서 퍼붓는 비) 등이 있다.

그밖에도 농사 용어로 모종비, 목비(모낼 무렵에 한목 오는 비, 꼭 필요할 때 내린다고 목비, 여기서 목은 사람의 머리와 몸을 잇는 목이 중요하듯이 농사철에도 중요한 목이 있다), 웃지(모를 다 낼 만큼 흡족하게 오는 비), 꿀 비, 단비, 복비, 약비 등도 있다.

비의 양과 비 오는 기간과 관련해 궂은비(오래오래 오는 비), 소나기, 장맛비, 오란비(장마의 옛말), 마른비(땅에 닿기도 전에 말라버리는 작은 비) 등이 있고 비의 성질과 관련해, 찬비, 누리(우박)…. 비 오는 시기와 관련하여, 이른비, 늦은비, 그믐치, 보름치, 단비(가뭄 끝에 달게 내리는 비), 봄비(일비, 봄에는 일이 많아 비가 와도 일을 한다), 여름비(잠비, 여름에는 바쁜 일이 없어 비가 오면 잘 수 있다), 가을비(떡비, 가을걷이가 끝나 떡을 해 먹으며 쉴 수 있다), 겨울비(술비, 농한기라 술을 마시며 놀기 좋다), 밤비 등이 있다.

비 오는 모양에 관여해서는 바람비(바람이 불면서 오는 비), 웃비(비가 다 그치지는 않고 한참 내리다가 잠시 그친 비), 해비(한쪽에서 해가 비치면서 오는 비), 여우비, 소나기, 먼지잼(먼지나 재울 정도로 조금 오는 비), 도둑비(예기치 않게 밤에 몰래 살짝 내린 비), 비꽃(비가 시작될 때 몇 방울 떨어지는 비) 등이 있다.

나처럼 비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우리말의 이 하나하나 비 이름들이 아주 정겹게 느껴진다.

그리고 때마다 비의 상태에 따라 그 느낌이 다른 것이 잘 표현돼있어서 그 말이 하나하나 모두 사랑스럽다.

사람의 몸은 기압과 습도와 일조량에 민감한 영향을 받는데,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은 기분이 가라앉거나 울적해지는 것이 그 영향이라고 한다.

그중에서도 우리 뇌의 송과선에서 분비되는 멜라토닌이라는 생체 리듬 조절 호르몬은 눈을 통해 들어오는 빛의 양에 따라 분비량이 조절되므로 밝은 대낮에는 아주 조금만 나오고, 어두워지면 많이 나와 우리가 편안하게 잠을 자도록 유도한다고 들었다.

그래서 불면증에는 멜라토닌을 투여하기도 한다는데 긴긴 장마철 우울증에 빠지는 사람이 많은 것은 그 멜라토닌 때문인 모양이다.

그건 의사들 말이고….

* 자세한 내용은 김원 건축가의 저서 '행복을 그리는 건축가', '꿈을 그리는 건축가', '못다 그린 건축가'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정리 : 이세영·성도현 기자>

raphae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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