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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7 (화)

이슈 끊이지 않는 학교 폭력

[단독] “‘능욕 요청’해도 성범죄 미적용…가해자는 교사가 되겠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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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주소가 모두 공개된 사진을 올려놓고 ‘능욕해주세요’라 하고, ‘협박해서 노예로 만들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성적으로 괴롭혀달라는 표현은 없었기 때문에 성범죄가 안 된다네요.”

세계일보가 지난달 30일 만난 서울의 한 고등학교 재학생 A(18)양은 자신을 상대로 텔레그램 딥페이크(인공지능으로 이미지·영상 합성) 성범죄를 시도한 가해자를 지난 5월말 직접 잡았다. 비교적 짧은 시간에 가해자를 특정하면서 추가 피해를 막을 수 있었지만, 사건의 여파는 여전히 그를 괴롭히고 있다.

시작은 지난 5월 중순쯤 자신을 ‘경찰 준비생’이라고 소개한 제보자로부터 “디지털 성범죄에 연루됐다“는 메시지를 받은 것이었다. 스팸 메시지라 생각해 넘겼는데, 친구가 딥페이크 범죄가 요즘 심각하다고 하기에 제보자에게 연락해봤다.

그렇게 받아본 자료에는 믿을 수 없는 내용이 가득했다. 캡처된 대화방에는 A양의 이름, 전화번호, 인스타그램 아이디, 집 주소, 신분증 사진을 비롯해 A양이 갖고 다니던 USB 속 각종 자료와 이력서, 가족관계증명서까지 다 뿌려져 있었다. 가해자는 단체대화방에서 “A양을 능욕해 줄 사람을 찾는다”고 한 뒤 그런 사람이 나타나면 개인대화방으로 넘어와 A양에 대한 더 자세한 자료를 공유했다.

학교에서 대체로 말 없이 지내는 편이라는 A양은 누군가와 싸운 적도 없는 자신에게 이렇게 큰 악감정을 가진 이가 있다는 게 너무 무섭고 불안해졌다고 했다. 가해자는 같은 학교 학생이 분명했는데 누구인지 짐작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제보자로부터 “지금 본인 인스타그램 비공개 계정에 팔로우 신청한 사람을 확인해보라”는 말을 들었다. 가해자가 막 A양의 비공개 SNS에 친구 신청을 했다고 언급했다는 것이었다.

확인해보니 아는 이름이 맞았다. 같은 반 남학생, 그가 속한 무리에서 오히려 ‘정상적’으로 보였기에 의심할 생각도 못했던 B군이 가해자라는 사실에 아연해졌다. B군의 텔레그램 프로필 정보와 가해자 프로필을 대조해 동일인임을 확인한 뒤 경찰에 신고하니 “이 정도면 특정 가능하다”고 해 잡을 수 있었다. 제보자에게 첫 연락을 받은 지 일주일 만이었다.

빠르게 가해자를 특정한 덕분에 A양은 딥페이크 합성 피해는 입지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 신분증에 있는 사진 말고 다른 사진은 아직 확보하지 못한 가해자는 A양의 딥페이크 포르노 이미지를 제작하기 전 붙잡혔다. 시간이 조금만 지체됐다면 합성이 이뤄졌을 거라고 A양은 말했다. “인스타그램 공개 계정에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셀카 사진을 올리는데, 가해자가 범행을 결심하고는 제가 올린 사진이 없어서 구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며 “일주일만 늦었어도 사진을 올렸을 수 있는 상황이라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했다.

세계일보

지난 6일 오후 서울 종로구 보신각 일대에서 열린 텔레그램 딥페이크 성폭력 대응 긴급 집회 ‘불안과 두려움이 아닌 일상을 쟁취하자!'에서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나 혼자만 당한 게 아니었구나. 이렇게 많은 사람이 피해를 봤다니 정말 더 뿌리를 뽑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사건이 있은 지 수개월 뒤 A양은 자신이 겪은 일이 전국적으로 발생한 거대한 ‘딥페이크 포르노 제작 사태’의 일부였음을 알게 됐다. 더 크게는 2019년 텔레그램 N번방 성착취 사건부터 이어져 온 범행임을 직감했다. 가해자가 겹쳐 있을 수 있고, 이들이 다 잡히지 않으니 계속 범행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A양은 딥페이크 제작과 지인 능욕을 시도한 ‘미수’ 행위에도 경각심을 느낄 수 있도록 정당한 처벌 기준 등이 마련됐으면 해서 인터뷰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가해자는 A양을 특정해서 능욕해달라거나 노예로 만들겠다는 등 발언을 했지만 여기에는 어떤 혐의도 적용되지 않았다. 신분증 등 신상을 올린 것도 처벌할 수 없었다. 결국 USB를 훔친 것에 절도죄만 적용되면서 B군은 형사처벌을 피하고, 소년심판만 받았다.

노원경찰서 관계자는 이 사건에 대해 “절도죄와 개인정보보호법으로 접수됐고 경찰은 절도죄로 검찰에 송치했다”며 “주민등록번호 유출은 주민증을 신분 확인 용도로 사용해야만 처벌할 수 있는 사항이라 주민등록법으로는 처벌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능욕해주세요”라는 요청은 있었지만 디지털 합성된 것은 없었기 때문에 디지털 성범죄화는 어려웠으며, 능욕 요청 자체에 대한 처벌 규정도 확인하지 못했다는 게 경찰의 입장이다.

A양의 능욕에 관심이 있다고 한 이들과 B군이 개인대화를 나눈 건 제보자 포함 4명으로 추정되는데, 이에 대한 B군 휴대폰 포렌식도 이뤄지지 않았다. 경찰 측은 “당시 수사상 추가로 A양의 자료를 갖고 있는 사람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노원서 관계자는 “신종 범죄인 딥페이크에 대해 이제 미수 관련 처벌 규정 등을 보강하는 법안이 만들어지는 분위기”라며 “법안이 마련되면 그에 따라 처벌 가능한 부분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일보

학부모 단체, 시민단체 구성원들이 지난 4일 오전 서울 세종대로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딥페이크 성범죄 엄중 처벌 및 근본적 종합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뉴스1


“고3인데 이런 일을 겪으니 대학 생활을 꿈꾸기도 힘들어요. 가해자요? 수학교육과 가서 선생님을 하겠대요.”

전과가 남지 않는 소년심판에 회부된 B군은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에서 ‘강제전학’ 처분을 받았다. 영구적 기록이 남는 퇴학과 달리 강제전학은 4년 뒤면 기록이 사라진다. 대학 졸업 무렵에는, 취업 활동을 할 즈음엔 정말 아무 흔적도 남지 않게 된다는 얘기다. 교육청은 ‘일회성이었고 반성의 기미가 보인다’며 이렇게 결정했다고 한다.

A양은 “B군에게 사과 한 마디 받지 못했고, 학폭위에서도 자필 사과문을 학교에 제출한다더니 아무것도 없었다”며 “학폭위에서 변명하기 위해 반성하는 척만 했던 것이 너무 괘씸했다”고 말했다.

사건 이후 피해자 보호조치로 등교를 하지 않았더니 성적이 많이 떨어졌고, 우울증과 공황이 겹쳐 공부에 집중할 수도 없었다고 A양은 토로했다. 가해자는 떠났지만 그와 연락하는 친구들은 한 교실에 있다 보니 언제든 불법촬영을 당하거나 위해를 가할 수 있다는 불안이 커졌다. 그래서 교실에 들어갈 수 없는 상태가 돼 약물 치료를 하며 학업중단 숙려제를 쓰고 있다. 당장 올해 수능시험은 거의 포기한 상태다.

반면 B군은 새로 옮긴 학교에서 학교폭력 기록을 보지 않는 정시 전형으로 대학 진학을 준비하고 있다고 A양은 전했다. 그것도 교육 전공으로 수학교사가 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이렇게 피해자의 일상이 사건 이후에도 계속해서 손상을 입는 동안 가해자의 삶은 거의 균열 없이 흘러간다는 것은 피해자들을 가장 분노하게 만드는 지점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 편하게 이야기 나눌 사람이 있느냐’는 질문에 “딱히 없다”고 한 A양은 “다들 잊고 살기를 바라니 말을 더 할 수도 없고, 가족과 친구에게 감정 쓰레기통이 되고 싶지도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이 어려워졌는데 이런 불안감을 티내는 것 역시 내 약점이 되는 것 같아 자꾸 감추게 된다”며 “누군가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또 비슷한 일을 당하면 어떡하나 수시로 두려워진다”고 했다.

정지혜 기자 wisdo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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