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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6 (토)

"달려주십쇼" "개처럼 뛰는 중" 4남매 둔 쿠팡 하청 배송기사 과로사 의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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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팡 직원이 하청 배송기사에 구체적 업무 지시
"물건 200개 중 1개만 늦어도 해고 위험" 주장
쿠팡 "국토부 표준계약서 준수, 영업점에 요구"
CLS 하청 영업점, 4대보험 미가입 2만 명 적발
한국일보

1년 2개월 동안 쿠팡 퀵플렉서 야간 배송기사로 일하다가 올해 5월 28일 오후 출근을 앞두고 숨진 고(故) 정슬기씨가 간접고용 원청 관계인 쿠팡로지스틱스서비스(CLS) 직원과 나눈 대화 갈무리. 택배노동자과로사대책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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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분명 쿠팡 로켓배송 일을 했습니다. 아들이 떠난 지 한 달이 된 오늘까지도 사용자는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쿠팡은 모두 대리점(영업점) 책임이라며 발 빼고 있습니다. 다시는 저희 아들과 같은 억울한 죽음 없는 안전한 세상, 가난하고 힘없는 노동자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평등한 나라를 만들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쿠팡 하청 퀵플렉서 배송기사 고(故) 정슬기씨 부친

쿠팡 새벽 배송을 해온 40대 배송기사가 지난 5월 숨진 사건과 관련해 과로사 의혹이 제기된 가운데, 원청인 쿠팡이 하청 배송기사에게 수시로 업무 지시를 해왔다는 증거가 공개됐다.

쿠팡은 '업무시간과 업무량은 영업점과 기사가 협의해 정한다'며 직접 책임이 없다는 입장이지만, 사실상 고강도 노동 조건을 결정하는 불공정한 계약 구조는 물론 쿠팡 직원이 구체적인 업무 지시까지 관여해 '원청 책임'이 크다고 노조는 주장했다.

택배노동자과로사대책위원회와 정슬기(41)씨 유족 등은 3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서비스연맹 회의실에서 '쿠팡로지스틱스서비스(CLS) 택배노동자 과로사 관련 기자 간담회'를 열었다.

4남매를 둔 가장인 정씨는 지난해 3월부터 생계를 위해 CLS 남양주2캠프 모 영업점에서 쿠팡 퀵플렉서 야간 배송기사로 일했다. 쿠팡의 배송 전문 자회사인 CLS가 지역별 영업점과 위수탁 계약을 맺고, 이들 영업점이 다시 특수고용직인 퀵플렉서와 위수탁 계약을 맺는 '간접고용' 방식으로 쿠팡 물품 배송은 이뤄진다.
한국일보

지난달 17일 서울 시내의 한 쿠팡 물류센터에 주차된 차량 모습.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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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책위에 따르면 정씨는 지난 5월 28일 오후 출근을 앞두고 경기 남양주시 자택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숨졌다. 병원에서 밝힌 사인은 심실세동과 심근경색의증으로, '대표적인 과로사 원인인 심혈관계 질환'이라는 게 대책위 주장이다. 고인은 다른 야간 배송기사들과 비슷하게 평소 오후 8시 30분부터 다음 날 오전 7시까지 하루 10시간 30분, 주 6일을 일했다. 주 평균 노동시간이 63시간이었던 셈인데, 대책위는 '고용노동부 뇌심혈관계 질병 인정기준 고시'에 따라 야간근무(오후 10시~오전 6시)에 30% 할증을 적용하면 '주 77시간'을 일한 것과 같다고 설명했다.

쿠팡은 정씨 사건에 대해 "CLS는 배송기사의 업무가 과도하지 않도록 국토교통부 표준계약서에 명시된 주당 작업 일수와 작업 시간에 따라 관리해줄 것을 전문배송업체(영업점)에 요구한다"고 공식 입장을 밝혔다. 원청인 쿠팡은 직접 관련이 없다는 취지다. 지난해 10월 경기 군포시에서 발생했던 60대 배송기사 과로사 의혹에 대해서도 쿠팡은 '자사 근로자가 아닌 개인사업자'라며 노무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날 대책위가 공개한 카카오톡 내화 내역에 따르면 정씨는 업무 과정에서 CLS 원청 직원에게 입차(출근)시간, 배송 할당 수량, 프레시백 회수 여부 등을 시시각각 보고했으며, 물품 파손·분실·이상 시 대응법, 반품 등 배송 과정에서 업무 지시를 받았다. 같은 영업점 다른 배송기사가 배달해야 할 물량이 넘치자 CLS 직원이 "(슬기님) 도움이 시급하다", "달려주십쇼"라고 추가적인 업무 지시를 하고, 이에 정씨가 "개처럼 뛰는 중(이에)요ㅜ", "최대한 하고 있어요. 하고 (다른 직원 구역으로) 갈게요"라고 답하는 대목도 있다.

쿠팡 측은 이에 대해 "CLS는 배송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배송기사 문의에 대응하기 위해 대화채널을 운영하는 것이고, 직접적인 업무 지시는 엄격히 금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국일보

쿠팡노동자인권대책위와 공공운수노조가 지난달 17일 서울 송파구 쿠팡 본사 앞에서 해고무효 소송 승소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코로나19 집단감염 사태 당시 쿠팡의 방역실태를 외부에 알린 직후 계약이 만료된 노동자 2명은 쿠팡을 상대로 해고 무효 소송을 내 4년 만에 1심에서 이겼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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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각을 다투는 업무 압박은 '오전 7시 도착 보장'이라는 쿠팡 서비스 정책 때문이라는 게 대책위 주장이다. 한선범 전국택배노조 정책국장은 "쿠팡은 배송 마감시간을 두고 이를 못 지키면 (배송 구역 회수를 통해) 사실상 해고가 가능한 제도를 운영 중"이라면서 "기준이 0.5% 이상인데 하루 배송물량이 200개라면 1건만 배송 시간을 어겨도 구역을 뺏길 수 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책위는 2022년 2월 '택배노동자 과로사 방지를 위한 사회적 합의'가 형해화됐다고 비판한다. 당시 만들어진 국토부 표준계약서에는 '주 60시간 노동' 제한, 계약 기간 중 일방적 수수료 지급 기준 변경 금지 등의 내용이 담겼지만, 쿠팡은 지키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대책위는 "국토부와 고용부는 즉시 쿠팡에 대한 특별관리감독을 실시하라"고 촉구했다.

한편 이날 근로복지공단은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5월 말까지 CLS와 배송 위탁계약을 맺은 택배 영업점 528곳·물류센터(캠프) 위탁업체 11곳을 대상으로 산재·고용보험 미가입 여부를 전수조사한 결과, 4만948명이 산재·고용보험에 가입하지 않고 일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산재보험 미가입 2만868명, 고용보험 미가입 2만80명인데 대부분 대상이 중복돼 실제 인원은 2만여 명 규모다. 공단은 누락 보험료 47억여 원, 과태료 2억9,600만 원 부과 절차를 밟을 예정이다.

최나실 기자 veri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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