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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5 (금)

전두환 정부, 아웅산 테러에도 북한 지원 덥석 받은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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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기자(jh1128@pressian.com)]
아웅산 테러 이후 1년이 지난 1984년 전두환 정부가 예상을 깨고 북한의 수해 지원 제의를 받아들이면서 그간 막혀있던 남북관계가 다시 복원됐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당시 북한의 행동에 대한 전략적 판단으로 이러한 결정을 내렸다고 회고했다.

2일 통일부는 1981년 1월부터 1987년 5월까지 있었던 인도주의 협력 및 체육분야 남북회담과 관련, 1693쪽 분량의 문서를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지난 1984년 9월 8일 북한적십자사는 당시 큰 수해를 입은 남한에 물자 지원을 제의했다.

공개된 회담 사료에 따르면 정부는 처음에 북한의 제의를 거절하기로 결정했다. 북한 제의 다음날인 9월 9일 당시 남북대화사무국에서 청와대와 총리실, 국가안전기획부, 외무부, 보건사회부, 문화공보부, 국토통일원, 대한적십자사 등 관계부처가 모여 실무대책회의를 열었고 이들은 북한의 제의를 거부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다 정부 내에서 북한의 제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자는 의견이 대두되면서 9월 11일 국무총리 주재 관계장관회의, 12일 관계장관과 당시 여당인 민주정의당 3역 협의 등을 거쳐 북한의 제의에 대한 재논의가 이뤄졌다. 이후 전두환 대통령이 북한의 제의를 긍정적으로 수용하라고 지시하면서 9월 14일 대한적십자사가 성명을 통해 북한의 제의를 수락했다.

이후 양측은 수재물자 인수‧인도 등을 위해 9월 28일 직통전화를 재개했다. 해당 통신선은 1980년 8월 말 총리회담을 위한 실무대표접촉을 북한이 중단하면서 약 4년 동안 가동되지 않아 왔다.

직전인 1983년 아웅산 테러에 이어 1984년 4월 LA 올림픽 단일팀 구성을 위한 회담에서 언성을 높였던 남북이 돌연 수해 지원 물자를 주고받는 장면을 연출하며 남북관계가 급격한 변화를 맞았던 셈인데, 회담 사료에는 이러한 변동이 생긴 원인에 대해 언급되지 않았다.

이와 관련 당시 통일원 본부 조사연구실에서 근무했던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손재식 당시 국토통일원 장관에게 북한의 제안을 받아야 한다는 건의를 했다고 밝혔다.

정 전 장관은 지난 2020년 펴낸 회고록 <판문점의 협상가>에서 이 과정에서의 뒷이야기를 상세히 서술했는데 그는 "손재식 장관님이 북한 수해 물자 거절 방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길래 받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답했다"며 "그동안 (북한이) 숱하게 위장평화공세를 펼쳐왔는데, 다시는 그런 장난을 못 치게 하려면 받아버려야 합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정 전 장관은 당시 손 장관에게 "그런 장난을 못 치게 만든 뒤에 연이어서 적십자회담을 하다 보면, 실무 회담이지만 그걸 본회담으로 연결하면서 다시 이산가족 상봉 문제를 꺼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그는 "어차피 체육회담으로 (북한에)면죄부는 줬고, 남북 간에는 저쪽에서 어떤 위협적인 행동을 할지 모르는 것을 탐색하고 감시하는 차원에서 회담을 계속 이어가는 게 좋습니다"라며 장관을 설득했고, 이후 기존 방침이 변경돼 물자를 받겠다는 성명이 나갔다고 밝혔다.

정 전 장관은 "수해 물자를 인도하기 위한 회담이 판문점에서 열렸다. 북한 측이 우리 보고 안 받겠다더니 왜 다시 받겠다고 하냐는 말은 할 수는 없는 터였다. 본인들의 진정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회담장에 나와야 했다. 그러고 나서 수해물자가 오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남북 간 적십자회담이 시작됐다. 정 전 장관은 해당 저서에서 "1985년으로 넘어가면서 이산가족 고향 방문, 예술단 교환 방문 프로그램을 만들기로 합의되어서 추석 무렵에는 이산가족과 예술단원 50명씩이 내려왔다"고 밝혔다.

남한 정부의 예상과 다른 물자지원 수용에 북한은 비상이 걸렸다. 지원해줘야 할 물자를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정 전 장관은 1989년 랴오닝성 공산당 외사처의 왕민이 "1984년에 북한이 남한에 수해물자를 주겠다고 호기롭게 얘기했다가 한국에서 정말로 받겠다고 하니까 그 물자를 마련하느라고 북한이 무척 애를 먹었다"는 이야기를 전해줬다고 밝혔다.

그는 "북한이 당시 쌀을 7000석 보냈는데, 1석이 144킬로그램 정도니까 다 합해 1000톤 정도 된다. 지금 같으면 얼마 안 되는 것 같지만 당시 북한으로서는 막대한 양이었으니까 구멍이 뚫린 것"이라고 말했다.

정 전 장관은 "1984년이었으니 북한 경제가 제로 성장 중이었을 때다. 북한에서 물자를 받는 것은 드문 일이었으니 보내온 쌀의 샘플을 살펴봤는데 색이 회색이었다. 오래된 쌀이었던 것"이라며 "북쪽 사람들의 어려움을 짐작했다. 그 쌀로는 밥을 지어 먹기는 좋지 않아서 가루를 내서 백설기로 쪄서 먹고 그랬다"고 설명했다.

그는 "당시 받은 시멘트에도 문제가 있었다. 시멘트도 밀가루처럼 강력, 중력, 박력으로 분류되는데 북측에서 박력 시멘트를 보내왔다. 벽에 바르면 주르륵 떨어져버려서 도로 포장용으로밖에 쓸 수가 없었는데, 그나마도 그 시멘트로 포장한 길은 잘 깨졌다"며 "(북한이 물건을) 구하느라고 정말 애를 먹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갑갑하더라"라고 회고했다.

프레시안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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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기자(jh1128@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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