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6.30 (일)

"내 재산 탈취하는 정부, 믿을 수 없다" 2천 년 지나도 살아있는 문제의 씨앗 [스프]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중국 智囊, 상하이 토크쇼 ③] 한무제가 남긴 최대의 잘못은 이거다 (글 : 신형관 중국자본시장연구소 소장·(前)미래에셋자산중국 대표이사)

SBS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SBS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중국인은 역대 왕조의 특징을 나타내는 글자를 더해서 간결하게 부른다. 예를 들면 패진(霸秦), 강한(强漢), 성당(盛唐) 등인데, 전반적으로 이 세 왕조는 그들의 자부심이고, 후대 왕조는 그보다는 못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천하통일 후 진나라 인구는 2,600만 명이었는데, 한나라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5천만 인구 대국이었다. 이 거대한 나라를 무려 54년간 집권한 황제가 바로 한무제(漢武帝) 유철(劉彻)이다. 그는 진시황과 동급으로 '진황한무'(秦皇汉武)로 불리는 중국의 '역대급' 황제이다.

SBS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중앙 권위의 재건이었다. 지방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추은령(推恩令)을 공포하여 지방의 모든 왕들은 여러 아들에게 강제로 땅을 나눠주도록 했는데, 이는 특혜가 아니라 덫이었다. 한 세대 뒤에는 세력과 재력이 흩어져 중앙에 맞설 힘이 저절로 사라지게 한, 신의 한 수였다.

SBS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제자백가 중에서 가장 체제 순응적인 집단인 유가를 공식 치국이념으로 정하여 군신, 부자, 충효를 강조하고 반란은 대역죄라고 국민의 의식을 통제하려 했다. 또, 한무제는 선대 황제의 화친 정책을 파기하고, 서쪽 흉노, 동쪽 고조선, 남쪽 베트남 등과 전쟁을 함으로써 내부 결속을 도모하였다.

그를 도와 제도적 개혁을 한 사람이 바로 중국 역사상 최고의 재테크 귀재, 당대 제일의 수학 천재 상홍양(桑弘羊)이다. 그는 재벌가 출신으로 돈을 주고 조정에 들어가서 평생 한무제를 따른다. 상홍양은 그 어렵다는 산업, 유통, 조세 등 3대 개혁을 모두 단행했다.

산업 개혁의 중점은 국유화였다. 소금, 철, 술 등으로 중국 역사상 진정한 첫 번째 국유기업을 세웠다. 제나라 관중은 민간은 생산하고, 국가가 사는 구조였지만, 한무제 때는 국유기업이 직접 철을 만들었다. 국유 방산업체의 철로 제작한 최첨단 고성능 무기로 한나라 병졸 하나가 다섯의 흉노족을 상대했다. 중독성을 가진 술, 차, 소금 등은 다시 찾게 되니 나라의 벌이는 늘어났다.

상홍양은 백성이 쉽게 부유해지지 않으며, 국가 유지를 용이하게 하는 것이 국유기업의 상업적 비밀인 것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SBS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또한 유통 분야도 개혁하였다. 지방이 중앙에 바치는 조공은 구매 후 운송 과정에서 유실이 매우 컸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중앙이 각지에 사람을 보내 구매와 유통을 관리한 것이 균수(均输)다. 도매 성격으로 지역 특산품을 전국에 유통을 시켜 큰돈을 벌었다. 평준(平准)이란 물가관리위원회처럼 주요 소매물가와 소비 상품을 통제하는 것이다. 두 정책 시행 후 중앙과 지방의 정부 양곡 창고는 가득 찼고, 황궁 후원에 비단이 쌓여갔다.

한무제는 중앙이 직접 강력히 통제하는 경제 관리 제도를 확립하고, 중앙집권에 필요한 네 가지 기본 제도 중 세 가지를 집대성하여 한나라의 국력과 경제 규모를 압도적인 글로벌 원톱으로 만들었다.

SBS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백성이 부유해야 군왕도 부유하다는 기본 사상을 가진 유가는 산업의 국유화를 반대했다, 유가의 수장 동중서(董仲舒)는 한무제에게 낮은 세금, 중농 정책, 인의로 천하를 다스리라 조언했지만, 철혈(鐵血) 황제인 한무제와 재테크 달인 상홍양은 무슨 돈으로 전쟁을 하냐며 철저히 무시했다.

사실 중국 역대 모든 왕조는 유가가 아니라 관중, 상앙, 상홍양, 즉 법가(法家)의 치국을 배워 실천했다. 겉으로는 치국의 합법성 확보에 유리한 유가를 표방하지만, 세부 방법론은 법가를 차용하는 '외유 내법'(外儒內法)이었다. 역대 위정자들은 이상에 치우친 유가로는 현실 국가를 효과적으로 통치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SBS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문경(文景之治) 70년간 번성해 온 민간의 상업과 세력이 커진 지방정부를 다시 한무제가 찍어 누르니 지방과 유산계급은 다시 쪼그라드는 중국 역사의 법칙은 다시 확인되었다.

더불어 국유화로 민간 기업이 완전히 소멸되고, 중산층이 무너지는 등 많은 후유증을 남겼다.

'산민령'(算緡令)은 자진 신고한 재산의 20%를 세금으로 걷는 것이다. 당연히 부자들은 재산을 숨겼고, 숨긴 자를 고발하면 뺏은 돈의 절반을 상으로 주는 고민령(告緡令)으로 사회는 두 동강이 났다.

부의 재분배를 가장 치졸한 방식으로 한 결과는 모든 중산층 가정을 파산시킨 것이라고 사마천은 사기에 기록하였다. 불만을 품은 대농령(농업부 장관)에게 '복비'(腹诽) 즉, 마음속으로 욕한 죄라고 처형을 하였으니, 아마도 궁예는 관심법을 한무제에게서 배웠을 것이다.

정부가 언제 무슨 방법으로 재산을 압수할지 모르기 때문에 "백성이 저축을 하지 않고 바로 먹고 써 버린다"라고 사기의 '평준서'(平準書)편에 기록한 것처럼, 한나라 이후 청나라 말까지 중국의 부자들은 산해진미를 먹고, 극도의 사치를 하며, 九妾(아홉 명의 첩)을 두는 등 지금 가진 돈으로 오늘만 사는 사회 풍조가 형성되었다.

SBS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무제는 재위 52년 차(사망 2년 전, 기원전 89년)에 '죄기조'(罪己詔)'란 반성문을 썼다.

'내가 잘못했다. 즉위한 이래 나라를 거칠게 다스려 천하가 고통받았고, 백성들에게 상처를 입혔으니, 이 모든 것을 탓할 만하다'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황제가 쓴 반성문이었다.

하지만 한무제의 문장은 가혹한 정치로 고통받은 백성들에 대한 연민과 자기 반성은 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의 최대 실책을 알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자손만대에 두고두고 후과를 남긴 최대의 잘못은 바로 계약 정신을 부정하여, 향후 중국 대륙과 아시아 국가에서 2000년간 민간 자본이 축적될 수 없는 환경을 만든 것이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SBS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SBS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심영구 기자 so5what@sbs.co.kr

▶ 네이버에서 S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가장 확실한 SBS 제보 [클릭!]
* 제보하기: sbs8news@sbs.co.kr / 02-2113-6000 / 카카오톡 @SBS제보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