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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0 (일)

북·러 밀월에 "한국 핵무장" 분출…'공포의 착시효과'가 부채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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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동맹이 ‘금기어’로 삼아왔던 핵무장론의 고삐가 풀렸다. 북한의 고강도 도발 등 한반도 긴장 수위가 올라갈 때면 국내 일각에서 고개를 드는 다소 급진적 논리처럼 치부돼 온 한국의 자체 핵무장 필요성이 이제 한·미 양국에서 공공연히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간 사실상 군사동맹 체결, 동맹을 경시하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귀환 가능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어느 때보다 위기감을 높이고 있는 게 배경이다. 이제는 ‘공포의 핵 균형’을 통해 스스로 안보를 지킬 수밖에 없다는 절박함에서 비롯된 논의이지만, 대가를 간과한 공포의 착시 효과도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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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악수를 하는 모습. 노동신문.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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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서 터진 핵무장 논란



핵무장론을 앞장서 공론화하는 건 한·미 정치권이다. 여당인 국민의힘 당권 경쟁에선 핵 무장이 ‘선명성 경쟁’의 이슈로 떠올랐다. “이제는 우리도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나경원 의원을 필두로 “핵무장의 잠재적 역량을 갖추자”(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 “한·미 간 핵 공유 협정으로 사실상 핵무장과 같은 효과를 거둘 수 있다”(윤상현 의원), “핵무장에 앞서 ‘워싱턴 선언’의 실효성 확보를 통해 억제력을 강화할 때”(원희룡 전 국토교통부 장관) 등 다양한 의견이 표출된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도 손에 잡히는 논의가 진행되는 건 미국의 달라진 기류 때문이다. 미 의회 상원 군사위원회 공화당 간사인 로저 위커 의원(미시시피)은 지난 21일(현지시간) 한국 등과의 핵 공유 협정 체결, 인도태평양 지역으로의 핵무기 전진 배치 등을 논의하자고 공개 촉구했다.

북·러 간 위험한 동맹이 핵 비확산을 우선하며 한국의 독자 핵무장 논의를 우려스러운 시선으로 지켜보던 워싱턴 조야의 분위기 자체를 바꾼 셈이다. 바이든 행정부조차 확장억제 강화라는 기존 방침을 확인하면서도 “러·북의 행동으로 역내 국가들이 기존의 군사 및 기타 조치를 재고하게 만들고 있다는 의견에 동의한다”(24일 커트 캠벨 국무부 부장관)며 한국 핵무장론에 대한 철벽을 거두는 조짐이다.



'트럼프 트라우마'…'보험' 심리도



한국민 입장에선 ‘트럼프 트라우마’도 무시하기 힘들다. 김정은이 불법적 핵무기를 손에 쥔 채 푸틴이 제공하는 합법적 핵우산을 쓰겠다는 마당에 주한미군 철수나 핵 자산 한반도 전개 축소 등을 주장하는 트럼프가 재선할 경우 확장억제에 공백이 생길 개연성도 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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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난 22일(현지시간) 펜실베니아 필라델피아 선거 유세에 참석한 모습. 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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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장기간 핵무장론이 제기되는 배경도 미국의 핵우산에 대한 신뢰 문제다. ‘북한이 핵을 쓸 경우 미국이 샌프란시스코를 포기하고 서울을 지킬 것이냐’는 오래된 딜레마다.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훼손하면서까지 칼집 안의 ‘핵 보검’을 꺼내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구심은 ‘한국을 핵무장 시키는 게 싸게 먹힌다’는 식의 트럼프 측 인사들의 공개 언급을 보며 더 증폭될 수밖에 없다. 트럼프 2기 출범 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후보로 거론되는 엘브리지 콜비 전 국방부 전략·전력개발 담당 부차관보는 “주한미군을 중국 견제에 활용하는 대신 한국의 자체 핵무장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5월 중앙일보 인터뷰)고 말했다.

최근 미국의 핵우산을 신뢰한다면서도 핵 무장을 해야 한다는 추이가 여론조사를 통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두고도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데, 역시 트럼프의 귀환에 대한 불안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한 축을 이룬다. 언젠가는 미국이 핵우산을 거둬들일 수 있다는 불안감에 ‘보험’을 원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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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19일 평양 에서 정상회담 뒤 서명한 조약을 들어 보이는 모습. 타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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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우산 믿는데 핵무장도 원해"



2022년 2월 시카고국제문제협의회(CCGA)의 여론조사(1500명)에 따르면 “확장억제를 매우 믿는다”는 응답자의 78%, “확장억제를 다소 믿는다”는 응답자의 76%가 핵무장을 지지했다. 동아시아연구원(EAI)이 지난해 9월 중앙일보와 함께 진행한 면접조사(1008명) 자료를 근거로 로지스틱 회귀분석을 했더니 “미국이 한국에 제공하는 확장억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일수록 도리어 한국의 핵무장을 지지한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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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원 기자



김양규 동아시아연구원 수석연구원은 “지난해 워싱턴선언 등을 통해 강화된 미국의 확장억제에 대해 한국인들이 ‘현재’는 높은 신뢰를 보내는 게 사실”이라며 “그러나 트럼프 변수 등을 고려하면 ‘미래’의 확장억제는 보장할 수 없기에 일종의 보험 심리가 작용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조차도 결국 대다수 핵 무장 지지자들이 핵을 가졌을 때 치러야 할 비용은 간과한 채 감지되는 위협에 즉각적으로 반응한 결과로 보는 게 타당하다는 지적이다. ‘한국의 핵무장’은 ‘미국의 핵우산’에 의존하지 않는 게 핵심인데, 하나를 보험처럼 둔 채 두 선택지의 병립을 원하는 것 자체가 사실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마치 ‘다다익선’이 가능한 것처럼 공포의 착시효과가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핵무장 '대가' 알면 지지 철회



실제 핵 보유가 초래할 수 있는 대가를 함께 제시했을 때는 핵무장 지지 응답이 대폭 감소한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지난해 6월 통일연구원의 여론 조사(1001명 대상)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60.2%가 한국의 핵 보유에 찬성했다. 그러나 경제 제재, 한·미 동맹 파기, 안보 위협 심화, 핵 개발 비용 부담, 환경 파괴, 평화 이미지 상실 등 핵 보유로 인해 초래할 가능성이 있는 시나리오를 제시하자 찬성 비율이 36~39%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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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원 기자



이는 한·미 동맹의 본질과 직결되는 핵무장론을 단순히 여론의 찬반에만 근거해 검토해서는 곤란하다는 우려로 이어진다. 핵을 원하는 한국인의 복잡다단한 심리 기제를 섬세하게 파악해야 정확한 정책적 처방도 가능하다는 게 여러 여론 조사를 통해 증명된 셈이다.

또한 한·미가 지난해 4월 핵협의그룹(NCG)을 창설하고 미국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의 가시성을 늘리기로 했지만 이런 일련의 조치의 정책적 효과를 국민이 충분히 느끼지 못한다는 방증으로도 볼 수 있다. 확장억제 강화의 ‘체감도’를 높이기 위한 조치도 함께 이뤄져야 하는 이유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정영교 기자 chung.yeonggyo@joongang.co.kr, 박현주 기자 park.hyun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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