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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0 (일)

고려청자 쏟아진 바다, 또 "심봤다"…베테랑도 놀란 1.5m 물체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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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26일 전북 군산시 선유도 해역에서 수중 발굴 조사를 위해 잠수사가 입수하고 있다. 사진 국가유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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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치지지직) 입수-. 수중장비 점검 이상무.”

“하잠.(잠수하라는 의미)”

“(치지직) 해저 도착.”

둔탁한 통신음과 함께 바다 속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바지선 위 잠수 통제실도 호응했다. 잠수사 마스크에 달린 영상장비를 통해 희뿌연 바다 속 부유물들이 통제실 컴퓨터 화면을 실시간으로 채웠다. 바지선에서 바라보는 해수면에선 잠수사의 공기 호흡을 알리는 물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왔다. 주변에 늘어선 파란 깃발들이 이 일대가 ‘통제구역’임을 알렸다.

26일 오전 전라북도 군산시 인근 선유도 해역 수중유산 발굴조사 현장. 바지선에서 남쪽 20m 떨어진 지역의 수심 5m 구간을 탐색하던 김태연 잠수사가 입수한 지 10여분 만에 무언가 발견했다는 신호를 보냈다. 해저 60㎝가량 파내려간 곳에서 거무스름한 물체가 발견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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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전북 군산시 선유도 해역에서 수중 발굴 조사를 진행 중인 국립해양유산연구소 관계자들. 물 속에 들어간 잠수사가 보내오는 영상 통신 정보를 바지선 잠수통제실에서 체크하는 모습이다. 사진 국가유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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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센 물살에 떠내려가지 않게 물체를 이양 틀에 단단히 묶은 상태로 김씨가 물 위로 올라오자 정헌 학예연구사 등 국립해양유산연구소 직원들이 다가갔다. 바지선 바닥에 내린 물체는 길이 1.5m 가량의 두툼한 목재. 정헌 학예사가 “선박 부속품 같다”고 했다. 함께 잠수했던 나승아 연구원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망태를 내려놨다. 사슴뿔과 도기 파편이 한가득 들었다.



선사시대부터 해상활동…고려청자 등 쏟아진 곳



군산 선유도 해역은 국가유산청(옛 문화재청) 국립해양유산연구소가 지난 2021년부터 수중발굴조사를 해온 곳이다. 앞서 1·2차 발굴을 통해 고려청자와 조선백자·숯돌 등이 출수(출토의 의미)된 데 이어 지난해 3차 땐 청동기 시대 마제석검 조각까지 나왔다. 총 670여점의 출수 유물은 국내 수중유산 발굴 사상 가장 다채롭게 여러 시대를 아우른다. 이 일대가 선사시대부터 활발하게 해상 교류하던 생활 터전이란 의미다. 국가유산청이 태안 마도선 같은 침몰 선박 발견을 기대하며 예산을 투입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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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전북 군산시 선유도 해역에서 진행된 국립해양유산연구소 수중 발굴 조사에서 발견된 목재. 약 1.5m 길이로 침몰한 선박의 부속구로 추정된다. 사진 국가유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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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전북 군산시 선유도 해역에서 진행된 국립해양유산연구소 수중 발굴 조사에서 발견된 선박 일부로 추정되는 목재 조각을 관계자들이 살펴보고 있다. 사진 국가유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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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은 지난 4월 시작된 3차 발굴조사에서 200번째 수중 입수가 이뤄졌다. 선박 파편을 건져올린 김태연 잠수사는 잠수 경력 20년의 베테랑으로 2017년부터 수중유산 발굴에 참여해왔다. 2021년 선유도 1차 조사 당시 고려청자 80여개를 건져올린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날 선박 파편을 발견한 소감은 그때처럼 “심봤다”라면서 웃었다.



3차 발굴 200번째 수중 탐색…“선박 묻혔을 가능성”



수중유산 조사는 지표 매장유산 조사와 차원이 다른 어려움이 있다. 일단 개인 착용 장비가 엄청나다. 잠수사는 특수 마스크(밴드 마스크)를 쓰는데 여기엔 생명줄이라 할 실시간 공기 주입 케이블이 달린다. 마스크 상단엔 영상·조명·통신 장비가 달려 있어 물 속 상황을 바지선에 실시간 전달할 수 있다.

잠수 직전 착용하는 특수 조끼엔 도합 20kg 가량의 무게추가 달려 있어 물 속에서 균형을 유지할 수 있게 한다. 만약을 대비해 별도 착용하는 공기통(10kg)까지 총 30kg 이상의 장비를 차게 되지만 정작 물속에선 부력 탓에 무게를 느낄 수 없다고 한다. 연구소 측은 “무게추 개수는 조사 상황에 따라 바뀌는데 물 속 움직임이 가장 편해지도록 늘리기도 줄이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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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전북 군산시 선유도 해역에서 진행된 수중 발굴 조사에서 김태연 잠수사가 입수에 앞서 마스크와 공기통 등 장비를 점검하고 있다. 강혜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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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전북 군산시 선유도 해역에서 진행된 수중 발굴 조사에 참여한 잠수사의 장비가 놓여있다. 사진 국가유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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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유산의 경우 땅을 파는 과정까진 기계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물 속에선 일일이 사람이 해저면을 뒤집어야 하는 것도 다른 점이다. 이규훈 수중발굴과장은 “육상 발굴은 전면 제토(흙을 제거) 개념인데 반해 바다에선 사람이 구간을 정해 일일이 슬러지 펌프(일종의 진공 펌프)로 뽑아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뻘흙을 뒤집어 빨려나온 물길은 바지선상의 여과시설을 통과하며 유물을 걸러낸다. 걸러진 유물은 바지선에서 1차 세척 후 인근에 정박한 탐사선 누리안호로 옮겨져 긴급한 처리를 마친 뒤 연구소로 옮겨져 본격적인 보존처리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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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전북 군산시 선유도 해역에서 국립해양유산연구소 관계자들이 수중 발굴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물 속의 잠수사가 슬러지 펌프로 뽑아올리는 물길이 여과시설을 통과하면서 유물을 걸러내는 장면이다. 사진 국가유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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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조사대상 약 25만㎡…“3%도 못 팠다”



선유도 해역은 2020년 말 어로 활동을 하던 어민이 청자 파편을 발견·신고하면서 본격 발굴이 시작됐다. 첫 번째 신고지점이 기준이 돼 시굴 구획 설정을 하는데, 이 설정부터가 난제다. 몇 m 앞도 분간하기 힘든 바다 속에다 바둑판처럼 1m 간격으로 조사구간을 구분해놓고 들어갈 때마다 순서대로 탐색하게 된다. 전체 조사대상 면적이 약 25만㎡에 이르는데 아직 전체의 3%도 처리하지 못했다고 한다.

통상적으로 잠수 작업은 오전 7시30분부터 오후 4시30분까지 진행된다. 2인 1조로 들어가 회차당 대략 80~90분 바다 속을 누빈다. 조류와 수압 등으로 인한 부담을 고려해 잠수사당 입수 횟수는 1일 2회로 제한한다. 바다 물때를 감안해 열흘 작업 후 닷새 쉬고 다시 반복하는 식이다. “유물이 자주 출수되는 걸로 봐서 선박이 묻혀있을 가능성이 큰데, 전문 장비와 잠수사가 확충돼 작업을 서둘렀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김태연씨가 말했다.

군산 지역은 바다와 인접한 지리적 특성으로 비안도(2004), 십이동파도(2005), 야미도(2008) 등에서 해저유적 발굴조사가 이뤄져 왔다. 이 가운데 선유도는 고려시대에는 중국과 무역의 기항지 역할을 했고, 조선시대에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한 수군진(水軍鎭)이 설치되는 등 서해 항로의 중요한 기점으로 꼽혔다. 고려청자가 다수 출토된 것 역시 인근의 강진, 부안 등 가마에서 생산된 것을 개경 등으로 운송하던 활동이 활발했다는 의미다. 이 밖에 청동숟가락, 철제솥과 같은 선상 생활유물과 목제닻, 노(櫓), 키(舵), 닻돌 등이 출토된 것도 고선박이 침몰해 있을 가능성을 키우고 있다.

이규훈 과장은 “선박 매몰 가능성이 크다고 보지만, 그와 별개로 수시로 유물이 출토되고 있어 이 일대의 해상활동을 규명하는 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면서 “수중유산을 통해 우리 역사의 다채로운 측면이 조명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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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전라북도 군산의 선유도 해역 수중유산 발굴 조사 현장의 바지선에서 앞서 발굴된 주요 유물들이 언론 취재를 위해 공개되고 있다. 강혜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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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군산군도와 선유도

고군산군도는 고려시대 만경현(萬頃縣)에 속해 있었으며 이 중 선유도(仙遊島)는 군산도라 불리면서 고려와 송나라 사이의 중요한 기항지 역할을 하였다. 1123년(인종 원년)에 송나라 사신으로 왔던 서긍(徐兢)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의하면 군산도에는 사신을 접대하는 객관(客館)으로 쓰인 군산정(群山亭)이라는 건물이 있었고, 이와는 별도로 관청 건물도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바다신에게 제사지내던 곳으로 추정되는 오룡묘(五龍廟)와 불교 사원인 자복사(資福寺), 그리고 숭산행궁(崧山行宮) 등이 있었고 민가도 10여 호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무장한 군사를 실은 6척의 배가 송나라 사신의 배를 호위하고, 군산도 안에도 1백여 명이나 되는 군사가 도열하고 있었다는 기록을 통해 군산도는 서해안의 핵심 군사기지의 역할도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1323년(충숙왕 10)에 회원현(會原縣)의 조운선이 고군산군도의 선유도 근방에서 왜구에 의해 약탈당하고, 이들이 다시 남하하다가 추자군도에 상륙하여 노략질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고려 말 극심해진 왜구의 출몰로 그 기능이 마비된 군산도에는 1397년(태조 6) 수군 만호영(萬戶營)이 설치되었다. 이후 세종 때 옥구현 진포로 옮겨감에 따라 군산이란 지명도 옮겨져 진포가 군산포진(群山浦鎭)이 되고 기존의 군산도에는 옛 ‘고(古)’자를 붙여 고군산(古群山)이라 칭하게 되었다.

(이상 국가유산청 설명자료)

군산=강혜란 문화선임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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