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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기자수첩] ‘천하제일 횡령대회’ 부추기는 솜방망이 처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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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비즈



2022년 오스템임플란트 직원이 회삿돈 2000억원가량을 횡령한 사고가 터졌다. 엄청난 액수는 화제가 됐고, 인터넷상에선 횡령액 규모로 순위를 매긴 ‘천하제일 횡령대회’라는 제목의 밈(meme·유행 콘텐츠)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1등을 두고 겨루는 것 마냥 횡령 사고가 줄줄이 터지는 것을 풍자한 글은 당시 큰 호응을 얻었다.

그렇게 끝난 줄 알았던 천하제일 횡령대회는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BNK경남은행에서 3000억원 규모의 횡령 사고가 터지자, ‘New record(신기록)’ 타이틀을 단 경남은행이 오스템임플란트를 제치고 1위로 올랐다. 이달엔 우리은행에서 100억원대의 횡령 사고가 발생하며 순위표는 또다시 업데이트됐다.

이 표에 가장 이름이 많이 오른 곳은 단연 금융권이다. 은행을 비롯해 저축은행, 새마을금고·농협 등 상호금융에서 발생한 횡령 사고 규모만 4000억원대다. 국내 중소기업의 평균 매출액이 42억원(2022년 제조업 기준)인 점을 고려하면, 100곳의 기업이 연간 벌어들이는 수준의 돈이 통째로 증발한 셈이다.

문제는 횡령 범죄는 늘고 있으나, 횡령죄 처벌 수위는 너무 낮다는 점이다. 대법원에 따르면 횡령·배임죄 양형기준은 300억원 이상 5~8년(가중 7~11년), 50억원 이상~300억원 미만 4~7년(가중 5~8년)에 불과하다. 1억원 미만 금액은 4~16개월(가중 10~30개월) 수준이다.

새마을금고에서 2011년부터 10년 넘게 130억원을 가로챈 직원 2명은 각각 징역 5년, 3년 6개월을 구형받는 데 그쳤고, 같은 해 고객 명의로 49억원을 허위로 대출받아 빼돌린 농협 직원은 1심에서 징역 9년형을 선고받았다. 19억원을 횡령한 신협 직원은 징역 2년형을 받았다. “10년만 구치소에 살다 나오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자조 섞인 우스갯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횡령 규모가 수천억원대까지 늘었지만, 양형 시 참작하는 횡령액 기준은 여전히 300억원이 최대이다 보니 솜방망이 처벌이 내려지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300억원을 횡령했건, 3000억원을 횡령했건 같은 양형기준을 적용받기 때문이다. 검사 출신인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횡령 등 금융사 직원의 비위행위에 대한 양형기준을 손질하는 방안을 검찰, 금융위원회와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소설 ‘레미제라블’의 주인공인 장발장은 가난과 굶주림으로 한 조각의 빵을 훔친 죄로 19년간의 감옥살이를 했다. 수백억원, 수천억원의 돈을 빼돌려 주식·코인에 투자하고 명품백 등 사치품을 사들이는데 돈을 탕진한 범죄자들은 더 엄단해야 한다. 금융 당국과 법조계는 빠르게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김보연 기자(kby@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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