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규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지난달 27일 서울에서 한·일·중 정상회의가 열렸다. 2019년 8차 회의가 중국에서 열린 이후 4년 5개월 만에 재개된 이 회의에 대해 외교부나 일부 전문가는 3국 협력의 ‘정상화’ 또는 ‘복원’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지난달 정상회의가 기존과는 성격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가려 버린다. 이번 회의는 정상화나 복원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일본 문제’에서 ‘중국 문제’로 전환된 동아시아의 정세가 반영된 측면이 강하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그동안 회의가 개최되지 않는 동안 미·중 패권 경쟁은 가속화됐고, 한국인 징용자 문제를 둘러싼 최악의 한·일 갈등은 겨우 개선의 실마리가 마련됐다. 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한·미·일과 북·중·러의 대립 구도가 형성되는 등 동아시아 지역 정세는 현격한 변화가 발생했다. 이제 제국주의 시대의 부정적 유산 처리와 관련된 일본 문제의 시대는 지나가고, 미래의 패권을 둘러싼 갈등 처리와 관련된 중국 문제가 동아시아 지역의 중심 사안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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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동북아 주요 이슈로 등장
한·일 새로운 협력체로 대응해야
디지털 시대, 초국가 플랫폼 긴요
온라인 한·일 화해공동체가 대안
한·일·중 정상회의 취지 퇴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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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아세안+3’에 참석한 한·일·중 3국 정상은 그 연장선에서 첫 회동을 가진 이후 2008년 아세안과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1차 정상회의를 개최했다. 당시 동아시아에는 1997년에 발생한 IMF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유럽공동체인 EU를 모델로 한 동아시아공동체론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한·일·중 정상회의 역시 지역 협력과 통합을 지향하는 이런 공동체론을 기반으로 탄생했다. 그러다 2012년 일본에 아베 2차 내각이 들어서고, 이어서 2013년 시진핑 집권 1기가 시작돼 한·일·중 정상회의는 점차 공동체론의 본래 취지에서 멀어져 갔다. 이번 회의는 공동체론의 자취가 거의 사라지고 대신 중국 문제에 치중한 회의가 되어버렸다.
일본 문제의 시대가 지나갔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정상회의 당일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심규선 이사장의 인터뷰 기사가 보도됐다. 이 재단은 윤석열 정부가 지난해 3월 결정한 강제 징용 제3자 변제 해법을 실행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대법원에서 승소한 분들이 제3자 변제를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그들에게 지급할 120억원이 부족한 상황이라며 심 이사장은 한·일 양국 기업의 참여를 간곡히 호소했다. 한·일 정상회담에서 긴급한 재원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취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회담 이후 한·일은 내년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향해 협력을 강화하겠다는 원론적인 발표만 있었을 뿐이다. 적어도 이번 회담에선 일본 문제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최근 들어 한·일 관계 개선의 동력이 약화됐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일본 기업의 참여 없이 한국 기업의 재원만으로 변제금을 충당하게 된다면 국민들은 쉽게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제3자 변제에 반대하는 분들의 판결금을 법원에 공탁하고 이 문제를 종결시키려는 정부의 시도 역시 법정 소송으로 막혀있는 상황이다. 앞으로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수단이 마땅치 않아 보인다.
한·일 문제는 국내 문제
이런 우려스러운 상황에 대해 정부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혹시 제3자 변제 판결로 큰 파도는 넘었으니, 앞으로 항의의 잔물결은 일겠지만 시간이 가면 자연스레 소멸할 것이란 생각을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는 안이한 생각이다. 나는 ‘한·일 문제는 국내 문제다’라는 명제를 사용한다. 한국에서의 한·일 문제는 단순한 외교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국내 문제’이고, 한국 내 갈등이 일본과의 역사 관련 문제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다. 심한 경우 한국 내 갈등은 국제정세의 흐름을 무시하거나 이에 역행하기도 한다. 지금처럼 국내의 진영 대립이 극심한 상황에서 한·일 문제는 언제든지 재점화할 수 있다. 여기서 나는 이런 ‘국내 문제’를 해결하고, 동시에 현안으로 떠오른 ‘중국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방법으로 새로운 공동체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바로 디지털·온라인 공간에 기반한 한·일 화해공동체다.
디지털 혁명의 시대에 들어선 오늘날, 국민·영토·주권으로 구성된 전통적 국가 관념이 약화되면서 초국가 지역과 현상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디지털 문명국 시민들의 삶에 있어 국가 간의 차이는 크지 않다. 그런 여건 위에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는 제3 섹터, 혹은 초국가적 공동체의 공간이 넓어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난 칼럼에서 최근의 한·일 시민 간 교류에서 보이는 새로운 모습을 ‘사회적 화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 바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촘촘히 확대된 사회적 화해의 그물망을 버츄얼 공간에 구축하여 디지털 혁명의 시대에 부합하는 플랫폼을 만들 것을 제안한다.
디지털 한·일 화해공동체에 참여한 사람은 공동체 시민권을 갖게 될 것이다. 일정한 세금을 내는 공동체 시민은 국가 차원의 이익에 구속되지 않고, 국가 사회의 감정 대립에서 벗어나 양식과 공감에 기반한 공동체 시민의 정체성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공동체를 운영하는 거버넌스가 구성되고, 공동체의 사안을 숙의하고 결정하는 시스템도 구축될 것이다.
화해와 미래 함께 지향해야
가정이긴 하지만 화해공동체가 다루는 사업은 두 방향에서 진행된다. 우선, 화해 지향적 관점에서 과거사 문제를 다룬다. 국가 영역에서 발생하는 과거사 문제로 인해 국가 시민들이 민족주의적 감정에 흐르지 않도록 견제·조정·중재하는 역할을 맡고, 피해자의 상처를 치유하고 추모하는 사업, 공동의 역사 교과서 편찬 등의 시도도 담당한다.
또 미래지향적 사업을 진행한다. 학술·문화·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교류가 이루어지고, 온라인 상에서 도서관·박물관·전시관이 생길 것이다. 두 나라의 언어를 사용하는 학교도 만들 것이다. 물론 수익 사업도 빠질 수 없을 것이다. 멀게만 느껴지는 이런 구상들을 어떻게 실행할 수 있을까?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1년, 내가 담당했던 학부 수업에서 당시 유행하던 메타버스를 활용한 적이 있다. 팀 별로 구성된 학생들은 ‘한·일 역사 화해와 한·일 공동체’라는 주제로 메타버스 콘텐트를 만들었다. 네이버의 제페토 같은 플랫폼에 한·일 공동체 월드를 만드는 것을 가정하고 거기에 담을 콘텐트를 만들게 했다. 앞으로 메타버스 기술이 발전하면 한·일 화해공동체 역시 그런 기술적 기반 위에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 시민권과 공동체 시민권을 공유하는 이중 시민권자가 증가하고 사업이 진척됨에 따라 ‘국내 문제’는 점차 완화되고, 한·일 공조가 심화되어 ‘중국 문제’에도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되기를 그려본다.
박홍규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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