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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8 (금)

‘절대영도’ 가까이… 양자실험 새 국면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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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연구팀, 분자로 BEC 구현

극저온서 ‘위치 불확실성’ 극대화… 여러 입자 마치 한 입자처럼 응축

원자보다 제어하기 어려운 분자… 5nK 온도서 2초간 상태 유지

“초전도-초유체 탐구 등에 활용”

동아일보

특정 입자들은 극저온 상태에서 일정 온도 밑으로 내려가면 가장 낮은 에너지 수준에 겹치며 응축해 ‘보스-아인슈타인 응축체(BEC)’를 형성하고 마치 하나의 덩어리처럼 움직인다. Will Lab, Columbia University·Myles Marshall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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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입자들은 온도가 ‘절대영도’인 0캘빈(0K, ―273.15도)에 가까워지면 거의 정지 상태가 되며 이때 독특한 양자 현상을 보인다. 미국 연구팀이 전기적 극성을 가진 쌍극성 분자를 극저온 상태로 만들어 ‘보스-아인슈타인 응축체(BEC)’라는 양자 상태의 물질을 세계 최초로 실험적으로 구현했다. 새로운 실험 기법을 통해 이전까지 도달하지 못했던 양자 현상의 탐구 영역을 넓혔다는 평가다. 특히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가 미래 핵심 전략기술로 삼고 있는 양자기술의 토대인 양자역학 최신 이론을 검증할 수 있는 신규 실험 플랫폼으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서배스천 윌 미국 컬럼비아대 물리학과 교수팀은 나트륨(Na)과 세슘(Cs)이 결합한 분자들을 약 5nK(나노캘빈·10억분의 1K)에서 BEC로 만드는 데 처음으로 성공하고 연구 결과를 3일(현지 시간)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공개했다.

● 물리학자 보스와 아인슈타인이 예측한 BEC

양자역학의 시초가 되는 연구를 진행한 독일의 이론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따르면 입자의 운동량 정보와 위치 정보는 반비례한다. 입자가 극저온에서 냉각돼 거의 정지에 가까운 상태라면 운동량이 명확해지는 반면 위치의 불확실성은 커진다는 뜻이다.

위치의 불확실성이 입자들 사이의 거리보다 커지는 임계에 도달하면 입자끼리 서로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입자들이 마치 하나의 덩어리처럼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이 덩어리가 바로 BEC다. BEC는 고체, 액체, 기체, 플라스마와는 또 다른 물질 상태다. 박지우 포스텍 물리학과 교수는 “여러 입자가 존재할 수 있는 가장 낮은 에너지 수준에 겹쳐 하나로 응축되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20세기 초 물리학자 보스와 아인슈타인이 이론으로만 예측한 BEC는 1995년 극저온 상태의 중성 원자들을 통해 처음 관찰됐다. 이 발견에 공헌한 물리학자 3명은 2001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원자보다 복잡하고 제어하기 어려운 입자인 분자로 BEC를 형성하려면 먼저 분자를 이루는 각 원자로 극저온 기체를 생성한 뒤 두 원자를 결합해 분자 기체를 만들어야 한다. 이때 두 원자의 결합이 기체의 온도를 높이는 현상을 제어해야 하는데 이는 물리적·기술적으로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다.

● 양자과학 최신 이론 검증 새 플랫폼 구현

분자 기체를 생성하는 데 성공한다고 해서 이 분자들이 바로 BEC가 되는 건 아니다. 분자 BEC를 만들기 위해서는 분자들을 더 냉각시켜야 한다. 윌 교수팀은 ‘증발냉각’이라는 방식을 활용했다.

BEC를 만드는 모든 과정은 초고진공 환경에서 레이저로 분자들을 붙잡은 상태로 진행된다. 레이저로 분자 기체를 담는 그릇을 만드는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분자들을 붙잡아 두는 것이다.

박 교수는 “레이저가 강할수록 분자 기체를 담은 컵이 깊어지는 것”이라며 “레이저의 강도를 점점 낮추면 가장 뜨거운 분자부터 날아가면서 기체의 온도가 조금씩 낮아지는 것이 증발냉각의 원리”라고 설명했다. 컵에 담긴 뜨거운 커피 표면에서 뜨거운 물 분자들이 날아가면서 커피가 식는 현상과 비슷하다.

문제는 증발냉각 과정에서 분자들끼리 서로 부딪치며 가열돼 분자들이 이탈하며 시료의 수명이 짧아지는 현상이었다. BEC를 안정적으로 만들기 쉽지 않았던 것이다. 연구팀은 전자레인지에 쓰이는 전자기파인 마이크로파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마이크로파가 기체를 이루는 분자들이 서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작은 보호막을 만든다는 사실을 활용한 것이다. 박 교수는 “마이크로파를 제어해 분자 기체의 안정성을 높였다는 것이 이번 연구에서 주목할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두 종류의 마이크로파를 조합해 증발냉각 과정을 제어한 결과 나트륨-세슘 기체 분자들의 온도가 임계값에 도달하며 BEC를 형성하는 것이 확인됐다. 연구팀은 “2018년 연구소가 생기면서 목표로 설정했던 성과”라고 전했다.

연구팀이 만든 분자 BEC는 5nK에서 2초간 유지됐다. 박 교수는 “분자 BEC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몹시 고무적인 수준”이라며 “시료를 유지하는 수명이 확보돼야 분자 BEC의 성질을 깊게 탐구하기 위한 추가 실험 및 응용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현재 원자로 만든 BEC는 수십 초 유지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분자 BEC는 전기 저항이 없는 초전도 현상이나 마찰이 없는 초유체 현상 등 다양한 양자 현상을 탐구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 또 원자 BEC보다 복잡한 이론을 실험해 볼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박 교수는 “쌍극성 분자 기체를 설명하는 이론은 다른 양자 물질로도 확장 가능하다”며 “양자과학의 첨단 이론들을 적용해 볼 수 있는 새로운 플랫폼이 생긴 것”이라고 밝혔다.

보스-아인슈타인 응축체(BEC)

온도가 극도로 낮아지면 존재할 수 있는 가장 낮은 에너지 수준에 여러 입자가 겹치면서 응축된다. 마치 하나의 덩어리처럼 움직이는 이 물질을 ‘보스-아인슈타인 응축체’라고 한다.


이병구 동아사이언스 기자 2bottle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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