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횡만리,성시인문(縱橫萬里-城市人文) ⑨] 남권(南拳)을 대표하는 무술의 도시 - 포샨(佛山) (글 : 한재혁 전 주광저우 총영사)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 길을 가라(讀萬卷書, 行萬里路)'고 하였던가? 장자(莊子)의 큰 새(鵬)는 아홉 개의 만 리(萬里)를 날아올랐다. 시성(詩聖) 두보(杜甫)가 가장 많이 쓴 두 자(字) 시어(詩語)는 '만리(萬里)'였다. 만리길은 무한한 상상(想像)의 영역인 동시에 현실이자 생활이었다. 20여 년간 중국 땅 위에서 일하고 살면서 시간과 공간의 들어가고 나옴 중에서 마주했던 같음과 다름을 지역과 사람, 문화로 쪼개고 다듬어 '종횡만리, 성시인문(縱橫萬里 城市人文)'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나누고자 한다.
중국에서 '우슈'라고 발음되는 무술(武術)을 얘기하면 흔히 '남권북퇴(南拳北腿)'를 언급하곤 한다. 중국이라는 땅이 넓으니, 북방에서는 하체와 발을 주로 쓰고, 남쪽에서는 상체와 주먹을 주로 쓰는 무술이 발전했다. 이는 자연환경 및 사람의 체형과도 관련이 많다.
북쪽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키가 크고 하체가 길어 발을 쓰는 편이 유리하다. 또한, 광활한 대지 같이 트인 공간에서 빨리 이동하거나 도약하여 상대를 제압하는 특징이 있다. 남방에서는 체구가 작은 대신 민첩하게 움직이면서 손과 상체를 활용한다. 대나무숲, 진흙탕이나 늪, 때로는 흔들리는 배 등 하체의 활동이 제한되는 환경이 많아 권법(拳法)이 발전한 면이 있다. 남권은 양생건체(養生健體), 즉 본인의 신체 반응과 의지력을 훈련하는 것을 강조하기도 한다.
중국 무협소설에 등장하는 무술의 대표지역으로 허베이 창저우(滄州), 안훼이 하오저우(毫州), 푸젠 추안저우(泉州), 화샨(華山), 숭샨(嵩山), 어메이샨(峨眉山), 우당샨(武當山) 등을 꼽는다. 그중 남권(南拳)의 요람이라면 단연 광둥 포샨(佛山)이다.
왼쪽부터 영화 <정무문>, 영화 <엽문>, 영화 <황비홍>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명나라 때부터 무술이 보급되기 시작해 청나라 때 홍권(洪拳), 영춘권(咏春拳), 채리불권(蔡李佛拳), 소림권(少林拳) 등 5대 문파가 여기에 자리를 잡았다. 청나라 말기 산재한 권법을 정리하여 영춘권의 사실상 시조 격인 양찬(梁贊)을 비롯해 황비홍(黃飛鴻), 엽문(葉問), 이소룡(李小龍) 등 많은 무술 대가들이 포샨 태생으로 주로 포샨을 무대로 활동하였거나, 원적을 포샨에 두는 등 밀접한 관련이 있다.
황비홍은 1856년 포샨 난하이(南海)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황석상(黃錫祥), 호가 비홍(飛鴻)이다. 3살 때부터 당시 유명 무술인인 아버지 황기영(黃麒英)으로부터 무술을 배우기 시작했고, 젊은 시절 대도회인 광저우로 진출해 무술을 가르친다.
26세에는 수군 병사들에게 무술을 가르쳤고, 30세 때에는 의관(醫館)인 바오즈린(寶芝林)을 설립하여 민간 의술과 무술을 함께 전파한다. 황비홍은 홍권(洪拳)의 대가이자, 사자춤(獅子舞)을 연구 및 정리하기도 하였다. 젊은 시절 광저우와 홍콩의 시장가에서 무술 교련으로 일하면서 도둑과 강도 수십 명을 혼자 상대해 물리친 일화로 유명하다.
엽문과 그의 제자 이소룡 (사진 : 바이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포샨시 제작 이소룡 홍보용 만화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엽문 역시 포샨 난하이에서 1893년 태어났다. 영춘권의 종사(宗師) 양찬의 제자였던 진화순(陳華順)과 양찬의 아들이었던 양벽(梁璧)으로부터 무술을 사사했다. 수십 년간 포샨에서 군인과 경찰을 비롯한 사람들에게 권법을 가르쳤다. 포샨 경찰국 형사대장 등 직무를 맡았었으나, 일본군의 침략이 강화되면서 어려움을 겪다가 마카오로, 이후 홍콩으로 이주해 주로 카우룽(九龍), 먀우마떼이(油麻地) 등지에서 권법을 가르치며 활동했다.
이소룡은 포샨 태생은 아니다. 포산 출신인 아버지가 부인과 함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광둥 전통극인 월극(粵劇) 공연으로 체류 중이던 1940년 태어났다. 그래서 이름도 샌프란시스코에 명성을 날리라는 의미에서 쩐판(振藩; 샌프란시스코는 중국어로 싼판(三藩)이라 했다)이라고 지었다.
이후 가족과 함께 홍콩에 정주한 이소룡은 16세 때에 포샨을 떠나 홍콩에서 활동 중이던 엽문으로부터 무술을 배운다. 엽문 문하에서 이소룡의 실력은 돌비맹진(突飛猛進)한다. 아버지의 권유로 미국 시애틀로 가 대학 공부를 하던 이소룡은 현지 무술대회에 참여하여 시범을 보이기도 했고, 1971년에 홍콩으로 돌아와 골든하베스트사의 영화 '당산대형(唐山大兄)'으로 데뷔하게 된다. 다음 해 주연으로 참여한 영화 '정무문(精武門)'은 공전의 히트를 친다. 33세에 불행히 요절한 이소룡은 쿵후(kung-fu)와 영화예술을 통해 그 시기 동서양을 모두 공감하게 한 문화인이기도 했다.
포샨시 전경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포샨이 중심적 역할을 하지만 사실 인근 다른 지역을 포함한 광둥 일대가 무술로 유명하다. 짜오칭(肇慶)은 '소림십호(少林十虎)' 중의 하나인 방세옥(方世玉)이 활동한 곳이다. '호학쌍형권(虎鶴雙形拳)'의 계승자 왕복화(王福華), '남권왕(南拳王)' 구건국(邱建國)의 활동 무대이기도 했다.
채리불권파(蔡李佛拳派)의 시조인 진향(陳享)의 고향- 쟝먼(江門) 신후이(新會), 홍권(洪拳)의 비조(鼻祖)인 홍희관(洪熙官)의 고향- 광저우 화두(花都), '철비원앙수(鐵臂鴛鴦手)'의 일대종사(一代宗師)인 황소협(黃嘯俠)의 고향- 광저우 판위(番禺), 월서홍권(粵西洪拳)의 대표자인 임위룡(林偉龍)의 고향- 마오밍(茂名) 등 나열하기 힘들 정도이다.
그럼 포샨을 비롯한 광둥 일대가 무술 강호(江湖)의 배경이 된 이유는 뭘까? 무술 본연의 이유 외에 외적 환경으로 볼 때 먼저 이 지역은 물산이 풍부하여 돈과 사람이 모였던 지역이다. 외국과의 교역도 많았다. 동시에 상대적으로 중앙정부와 물리적 거리가 멀어 관(官)의 힘이 미약했고, 민초들은 어려울 때 강호의 힘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심영구 기자 so5what@sbs.co.kr
▶ 네이버에서 S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가장 확실한 SBS 제보 [클릭!]
* 제보하기: sbs8news@sbs.co.kr / 02-2113-6000 / 카카오톡 @SBS제보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