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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8 (화)

[중앙 시조 백일장 - 5월 수상작] 풀 수 없는 매듭처럼 사무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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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



도래*지다

이미혜

손끝이 가슴을 훑고 겨드랑에 접는다

여물게 조그맣게 에누리 하나 없어

첫 매듭 도래 지으면 돌아올 길 아주 없다

남은 가닥 집게 삼아 씨줄 날줄 건너다

징검다리 얽음새 니 얼굴 보일까 봐

도래야 그기 답이야 꼭 조여라 맺힐라

매듭을 풀겠다고 도래로 가겠다니

오듯 가듯 갈마들다 뻔하지 길 잃을걸

매이다 사무칠 밖에 자르지도 못 할 걸

*도래: 한국 고유의 전통매듭의 하나로 모든 작품의 첫 번째 시작 매듭

■ ◆이미혜

중앙일보

이미혜


숭실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중



차상



별 우물

한승남

우물을 닮아서 품어주는 차가운 밤

소리의 세계까지 조용히 모아두어

섬돌을 딛고 올라서 별의 근황 묻는다

맞물린 돌기단에 나의 눈물 고여 놓고

천 년 왕국 그 자리에 별지기로 남아서

깊은 밤 담그는 날에 꼬리별을 찾는다

고개 들면 보이는 그대로인 아기 얼굴

내 곁에 남아 있는 슬픔 하나씩 퍼내면

다 자란 해맑은 웃음 비춰주는 첨성대



차하



초록

유은초

설렘의 다른 이름

스무 살 눈짓 같은

오랜 가슴앓이

어루만져 주는 약손

바람도 저 속에 들어

발꿈치를 헹군다



이달의 심사평



눈이 부신 5월이다. 5월 장원에는 이미혜의 ‘도래 지다’를 올린다. ‘도래’는 한국 고유의 전통 매듭에서 모든 작품의 첫 번째 시작 매듭이라는 뜻으로 신선한 소재를 차용한 점이 좋았다. 풀고 맺는 매듭공예를 통해 붙잡아 맬 수 없는 마음 깊숙한 곳의 갈등을 개성 있게 잘 보여주고 있다. 첫째 수, 둘째 수는 “돌아올 길 아주 없”는 길을 선택하였지만 마음은 남아 “징검다리 얽음새 니 얼굴 보일까 봐”라며 매듭을 더 조여야 하는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긴장감이 팽팽한 셋째 수에서 “매듭을 풀”기 위해 결국 매듭을 지으려 하는, 그 작은 ‘도래’의 길을, 가슴속에서 손끝까지 에이는 사무침으로 갈무리하여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차상은 한승남의 ‘별 우물’을 앉힌다. 고요의 세계를 끌고 와 서정의 별이 흐르는 맑고 단아한 작품이다. 둘째 수에서 “나의 눈물 고여 놓고” “천 년 왕국 그 자리에 별지기로 남아서,” “꼬리별을 찾는” “별지기”의 오랜 기다림이 처연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셋째 수는 “남아 있는 슬픔”을 “퍼내”고 “웃음 비춰”준다는 상승 이미지가 환하게 반짝인다. 제목을 첨성대로 하지 않고 ‘별 우물’로 앉힌 것이 참신했으며, 셋째 수 종장에 가서야 작품의 핵심인 첨성대를 찔러 넣어 시적 완성도를 높였다.

차하는 유은초의 ‘초록’을 앉힌다. “스무 살 눈짓”은 얼마나 투명하고 신선할까, 자연의 빛 ‘초록’이 “가슴앓이 어루만져 주는 약손”이라니, 그 감각이 참으로 따스하다. 종장에서 바람이 “발꿈치를 헹”구고 나오는 것을 보는 눈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랜만에 산뜻한 단시조를 만나게 되어 반가웠다.

권인애·이채율·전형우 작품들도 함께 논의되었음을 밝힌다.

심사위원 손영희·이태순(대표집필)



초대시조



틈을 읽다

강정숙

생이 지루하다고 제 몸통을 그었는가

태고사 가는 길목 깊이 금 간 바위 한 채

틈새를

열어놓고서

개미 떼를

풀고 있다

삶도 가끔 출렁대야 쓸쓸하지 않다며

오월 젊은 하늘이 천둥 비 쏟아내고

봄날은

공양간 열어

이팝꽃을

풀고 있다

■ ◆강정숙

중앙일보

강정숙


경남 함안 출생. 2002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조집 『천개의 귀』, 시집 『환한 봄날의 장례식』

바야흐로 5월, 산자락에는 찔레꽃이 환하고 들판엔 밀 보리가 누렇게 익어간다. 피천득은 “5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라고 은유했다. 생명의 기운이 왕성하게 분출되면서 날로 푸르러지는 신록은 메말랐던 감성에 활력을 얹어준다. 그러나 그 이면에 짙고 어두운 그림자가 보색으로 깔려 있다.

5월의 길목에 꽃구름 한 채씩을 머리에 이고 있는 이팝나무는 수수천만 하얀 손수건을 흔들며 이제 그만 눈물을 거두라는 시늉을 하고 있는 듯 하다. 시인은 이 광경을 “봄날은 공양간 열어 이팝꽃을 풀고 있다”라고 표현했다. 지상의 묵은 그늘을 밀어내는 꽃의 공양이 저토록 아름답다.

“삶도 가끔 출렁대야 쓸쓸하지 않다며/오월 젊은 하늘이 천둥 비 쏟아내고” 그런가 하면 시인은 5월 하늘을 이렇게 읊었다.

시조에서 백미라고 일컫는 첫째 수와 둘째 수의 종장은 한 음보를 한 행씩 네 행으로 처리했는데 여백을 두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싶다. 두 수로 이루어진 ‘틈을 읽다’는 힘차게 광야를 달리는 말의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듯 간결하면서 역동적이다. 정형시의 매력을 잘 살린 수작이다.

5월은 6월을 향해 미끄러지듯 달리고 밤하늘엔 만월로 가는 달의 얼굴이 고요하다. 그러나 시인들은 꽃이 피거나 지거나 달이 차거나 이울거나 늘 붉어 출렁대야 하리라. 마치 5월 젊은 하늘처럼…

책꽂이 한 켠에 고요하게 자리잡고 있던 시인의 첫 시조집 『천 개의 귀』를 다시 읽는 5월이다.

시조시인 정혜숙

■ ◆응모안내

다음달 응모작은 6월 18일까지 중앙 시조 e메일(j.sijo@joongang.co.kr) 또는 우편(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48-6 중앙일보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으로 접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등단하지 않은 분이어야 하며 3편 이상, 5편 이하로 응모할 수 있습니다. 02-751-5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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