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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4 (화)

주한미군과 '체스판의 폰' [뉴스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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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한국과 미국 군인들이 지난해 10월 20일 경기 여주시 남한강에서 한미 연합 도하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여주=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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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듯 ‘장기판의 졸’ 생각이 났다. 이런 한미관계는 안 된다. 아무리 힘들어도 이런 일방적 관계는 바꾸어야 한다. 더 이상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협상이 가능한 균등한 한미관계로 가자! 나는 다시 한번 다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무현 정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과 통일부 장관을 지낸 이종석의 저서 ‘노무현 시대 통일외교안보 비망록-칼날 위의 평화’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2003년 노무현 정부 출범 후 미국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주한미군 1만2,500명 감축 계획을 통보하면서 벌어졌던 일련의 상황에 대한 이 전 장관의 울분 토로였다.

2001년 9·11테러 후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을 강행하면서 미국은 ‘전략적 유연성’ 명분 아래 전 세계 미군 재배치를 추진했다. 실상은 두 개의 전쟁을 수행하느라 전력이 모자라니 동북아와 기타 지역의 미군을 빼서 구멍을 메우겠다는 이유가 강했다.

2002년 12월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승리한 뒤 인수위 시절부터 부시 행정부는 주한미군 지상군 감축 가능성을 언급했다. 미국 언론들은 툭하면 워싱턴발 주한미군 감축 추진 기사를 내보냈다. 그리고 2003년 6월 국방부 라인을 통해 실제 계획을 통보한 것이다. 한강 이북 미군 기지 재배치와 용산기지 이전, 이라크 1차 파병 같은 거듭되는 대미 양보에도 미국은 해외주둔군재배치검토(GPR)를 공개했고 결국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주한미군 감축을 밀어붙였다.

미국의 주한미군 감축·철수 역사는 매번 동맹 배려보다는 자국 이익 중심이었다. 6·25전쟁 정전 당시 32만여 명에 달했던 미군은 아이젠하워(1953년), 닉슨(1971년), 카터(1977년), 아버지 부시(1992년) 행정부의 감축 결정을 거치면서 2만8,500명 안팎으로 줄었다. 대선 공약 이행, 미중 데탕트와 냉전 종식 지원 등 모두 미국의 뜻을 관철하는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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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라네브 신임 미8군사령관이 지난달 5일 경기 평택시 캠프 험프리스에서 열린 사령관 이취임식에서 경례를 하고 있다. 평택=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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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미국 대선에 나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발 주한미군 흔들기가 시작됐다. “왜 우리가 부자 나라인 한국을 지켜줘야 하느냐”라는 지난달 주간지 타임 인터뷰와 함께 외교안보 참모의 ‘한반도 미군 인질론’까지 제기됐다.

미국 입장에서 주한미군은 북한의 침공 억제 역할을 넘어 동북아 및 세계 전략의 핵심 자원 중 하나다. 중국 봉쇄를 위한 주요 발판이기도 하다. 미 의회도 국방수권법으로 지지하는 게 주한미군 주둔이다. 한국은 또 방위비 분담금을 비롯해 토지 공여, 세금 및 이용료 면제, 카투사 지원 등으로 매년 3조 원 넘는 돈도 부담하고 있다. 이처럼 헌신을 다해 온 동맹을 상대로 미국은 ‘못된 형님’ 행세를 해서는 안 된다.

감축 여부와 함께 주시해야 할 일은 주한미군의 역할이다. 대만해협에서 중국과 대만·미국이 충돌하는 경우 주한미군이 이 사태에 개입하는 일은 한국의 운명에 최악의 시나리오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의지와 관계없이 주한미군으로 인해 한국이 동북아시아 분쟁에 휘말리는 일은 없다’는 원칙은 확고해야 한다. 다행히 신원식 국방부 장관도 ‘대만사태 주한미군 개입설’에 여러 차례 우려를 표명했다. 바이든 2기든, 트럼프 2기든, 내년 이후 한반도 안보 격랑에 대비해 한국과 주한미군이 ‘미국 체스판의 폰(pawn)’이 되지 않도록 각오를 다질 필요가 있다.

정상원 국제부장 orno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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