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안무가들, 이름을 찾다
안무 표절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걸그룹 뉴진스(위쪽)와 아일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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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뭐 죄다 ‘복붙’이야.” 지난 13일 ‘뉴진스 안무가’로 알려진 댄서 김은주·블랙큐가 아일릿의 신곡 ‘럭키걸신드롬’ 뮤직비디오를 저격하고 나섰다. 뉴진스의 맥도날드 광고 안무를 그대로 카피했다는 것이다. 지난달 민희진 어도어 대표가 제기한 아일릿의 ‘마이월드’와 ‘마그네틱’이 뉴진스의 ‘어텐션’과 ‘디토’ 안무를 표절했다는 시비가 해당 안무가들에게까지 옮겨붙은 모양새다.
이런 시비가 만일 법정에 간다면, 양측의 안무만으로 저작권 침해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 하늘 아래 새로운 동작이란 없기 때문이다. 뉴진스가 기본동작을 응용해 독창적인 안무를 만들어 냈는지부터 살펴야 하고, 그 독특한 포인트를 아일릿이 의도적으로 베꼈는지 여부를 판사가 재량껏 판단한다. 정량적 기준은 없다. 흔히 말하는 음악의 '8마디'도 와전된 것이다. 그런데 안무 표절이 법정에 간 적은 없다. 안무저작권이 돈이 되지 않기 때문에 굳이 소송을 제기할 실익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무저작권이 돈이 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시장이 천문학적으로 커진 K팝에선 안무가 일약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수 있다.
사실 지금까지는 안무가가 누구인지조차 모호하다. 뉴진스의 작곡가는 250(이오공)이라고 명시된 데 비해, 안무가는 비공식적으로 알려졌을 뿐이다. 그동안 안무가들은 안무 창작이라는 용역에 대한 대가만 받아왔을 뿐, 창작에 따른 권리는 엔터테인먼트 회사에 귀속되는 조건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2012년 세계적으로 히트한 ‘강남스타일’의 말춤을 만든 안무가 이주선도, 2021년 Mnet ‘스트릿 우먼 파이터’의 시그니처 안무(‘헤이마마’)를 만든 안무가 노제도 안무저작료 수입은 0원이었다. 플랫폼에서도 소외됐다. 틱톡·릴스·유튜브 등의 현행 시스템상 모든 수익은 음악저작권자에게 돌아간다.
‘강남스타일’ 말춤 안무가 수입 ‘0’
‘수익 0원’이라고 화제였던 스우파 노제의 ‘헤이마마’ 안무. |
이런 상황에 K팝 안무가들이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지난달 24일 원밀리언 댄스 스튜디오가 주축이 된 안무저작권협회가 출범을 선언했다. 허니제이·바다·바타·백구영·최영준 등 유명 안무가들이 발기인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원밀리언 대표 리아킴이 초대 협회장에 취임했다. 안무저작권 수익 분배 구조를 설계해 K팝 댄스를 산업화하려는 움직임이다.
문체부도 안무저작권 보호를 역점사업으로 삼고 있다. 지난해 12월 유인촌 장관이 ‘저작권 강국 실현, 4대 전략’을 발표하며 음악 방송에서 안무가의 이름을 노출하도록 권고할 계획임을 알렸고, 현재 저작권위원회와 보상체계를 연구하고 있다. 정태경 문체부 저작권정책과장은 “안무저작권 등록을 시스템화하고 수익 분배를 위한 보상 기준을 지표화하기 위해 시장조사와 실태 파악을 하고 있다. 이르면 연내 성명표시를 개선권고하고 표준계약서 제정을 시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2018년 멜론뮤직어워드에서 삼고무를 춘 BTS 제이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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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안무저작권 수익 배분은 세계 최초로 추진되는 일이라 주목받고 있다. 지난 3월 세계지식재산권기구(WIPO)에서 원밀리언 관계자를 제네바에 초청해 현황을 공유하기도 했다.
빌보드 집계 기준을 바꾼 싸이의 말춤. |
한국이 앞서가는 이유가 있다. 음악을 동영상 플랫폼에서 소비하는 ‘보는 음악’ 시대를 K팝이 선도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에도 ‘마카레나’처럼 전세계를 춤추게 한 댄스곡이 있었지만, 당시는 안무가 음악을 보조하는 수단일 뿐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2012년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빌보드의 기준을 바꿔버렸다. 당시 ‘강남스타일’이 유튜브 조회수 신기록을 세우는 엄청난 인기에도 라디오 방송횟수 때문에 빌보드 핫100차트 2위에 머문 것을 계기로, 2013년부터 유튜브 조회수를 집계에 포함시킨 것이다. 그 결과 BTS·블랙핑크 등이 빌보드 차트에 빈번히 올랐으니, 지금의 K팝 신드롬 1등공신이 안무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숏폼 댄스 챌린지 트렌드 때문에 K팝에선 음악보다 안무가 더 중요시된다는 게 정설이다.
하지만 K팝 안무가의 위상과 보상체계는 큰 변화가 없었다. 윤여욱 원밀리언 공동대표는 “‘스우파’ ‘스맨파’가 큰 인기를 끌었어도 리더들만 떴을 뿐, 팀원들은 유명세 외엔 방송 전이나 똑같다. 노력에 대한 보상 시스템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보상 시스템 설계가 쉽진 않다. 현재 K팝 안무는 연예기획사가 여러 안무팀에게 받은 시안에서 필요한 부분만 따서 조합하는 형식의 공동저작물인지라 한 곡에 수십 명이 관여될 수 있고, 기여도도 제각각이다. 시안에 참여할 때 저작권을 포기하는 특약을 요구받고 있기에 표준계약서 제정도 선결조건이다. 리아킴은 “업계의 관행을 깨부숴야 한다”면서 “어떤 회사는 댄서들이 SNS에도 참여 사실을 공개하지 못하게 한다는데, 댄서를 창작자가 아니라 외주용역 개념으로 생각하는 거다. 그래도 안무가는 활동을 이어가야 하니 기획사와 싸우지 않는다. 그게 관행이다. 그래서 협회가 필요하고 표준계약서가 필요하다.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드물게 안무저작권이 등록된 사례인 ‘한글비보이’ 공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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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다. 현행 저작권법으로는 안무저작물은 연극저작물의 하위 개념으로 인정될 뿐 별도로 분류되지 않는다. 한국저작권위원회에 따르면 저작권 등록 건수는 2019년 4만여 건에서 2023년 7만여 건으로 빠르게 증가하고 있지만, 5년간 안무 관련 등록 저작물은 191건으로 전체 저작물 중 0.061%에 불과하다. K팝 댄스의 등록은 전혀 없다. ‘한글비보이’ ‘우리가락 퓨전 난타’ 같은 공연물이나 장검무·장고춤 등 순수무용이 일부 등록돼 있을 뿐이다. 저작권 등록을 위한 가이드라인도 없다.
안무저작권이 이슈가 된 사례가 없진 않다. 2011년 걸그룹 시크릿의 ‘샤이보이’ 안무가가 해당 안무를 교습에 사용하고 영상을 올린 댄스학원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받았다. 2018년 BTS 제이홉이 한 시상식에서 삼고무를 춘 이후 민속무용으로 통했던 해당 춤의 저작권 등록 사실이 알려져 분쟁 끝에 창작성을 인정받기도 했다.
해외에선 미국 게임회사 에픽게임즈와 안무가들의 분쟁이 유명하다. 세계 최고 인기 게임인 포트나이트가 기성 안무를 무단 사용한 댄스 아바타 때문에 꾸준히 문제가 됐지만 안무저작권을 보호받지 못했다. 그런데 최근 안무가 카일 하나가미가 제기한 소송에서 판결이 뒤집혔다. 2022년 1심은 댄스 스텝이 저작권 보호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했지만, 지난해 11월 항소법원은 ‘짧은 동작도 창의적인 선택과 배열이 반영되어 있다면 저작권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판결했고, 지난 2월 합의에 도달했다. 유명무실했던 안무저작권이 존재감을 얻은 것이다.
문체부도 안무저작권 보호 역점사업으로
그래픽=이현민 기자 dcdcdc@joongang.co.kr |
법적 문제와 별도로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저항감도 있을 수 있다. 그동안 안무가를 밝히지 않음으로써 가수가 아티스트로서 안무까지 어느 정도 스스로 창작한다는 판타지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홍승기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안무가들이 지금껏 묻혀 있었던 건 창작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시장에서의 지위가 낮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난해 발족한 안무저작권학회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IP 중개플랫폼 위츠의 박진익 대표는 “방송사에서 성명표시권부터 해결해줘야 하는데 해묵은 연예계 서열 탓에 쉽지 않다. 공권력으로라도 빠르게 확산시켜야 인식도 개선될 것”이라며 “엔터업계에서도 누가 먼저 전향적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기대가 된다. 대형 기획사들은 무시하고 내부 안무가를 이용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 안무가들 권익도 신경써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저작권 수익배분이 실현되면 안무가들은 일반인들의 댄스 챌린지 영상이나 길거리 플래시몹에도 수익을 요구할까. 안무저작권학회장을 맡고 있는 함석천 대전지법 부장판사는 안무저작권을 ‘수익의 저수지’에 비유하며 “권리가 아닌 산업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물이 고일 수 있게 해서 나눠 써야지, 개별적으로 내 권리니까 쓰지 말라고 하면 결국 손해를 본다. 대중이 널리 사용하게 하고 수익을 나도 모르는 사이 분배받는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변화하는 미디어 세상에서 가장 발전가능성이 많고 우리가 잘할 수 있는 영역이 춤이다. 안무저작권이 산업으로 발전하면 미래 세대를 위한 좋은 먹거리가 될 것이다.”
유주현·황지영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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