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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4 (금)

[임경수 교수의 라이프롱 디자인] 길 위에서 길을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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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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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를 앞 둔 공직자나 명예퇴직을 신청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종종 강의 요청이 들어온다. 이 때 OO인재개발원과 같이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교육훈련기관들이 한결 같이 설명하는 게 '인생설계 교육과정'이다.

누구는 '제2의 인생설계'라고 하고, 누구는 '행복한 미래설계'라고 미사여구를 붙여놓았지만, 결국 '앞으로 어떻게 살면 좋을까?'의 마땅한 정보를 제공해 달라는 것이다. 이 가운데 필자에게 주어지는 과목은 주로 '재취업과 창업설계'이다.

제일 처음 인생설계 강의를 한 게 제주도였다. 2012년 즈음이니까 벌써 10년이 넘었는데, 서귀포 혁신도시에 이제 막 공공기관들이 들어설 때였다.

은퇴자를 앞에 두고 강의를 한다는 게 고난이지만 미리 서둘러 강의 교안을 만드는 일도 만만찮았다. 처음엔 이리저리 인터넷을 뒤지다가 제주올레길의 창업 스토리를 발견하고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래 이것이구나!' 싶어 망설임 없이 교안을 만들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길은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시작되었다. 언론사를 퇴직한 서명숙 선생(현 제주올레 이사장)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걸어가면서 인생의 나침반같은 지혜를 얻는다.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이 '한국엔 왜 이런 길이 없나?'라는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서명숙 선생은 고향인 제주로 돌아와서 올레길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관광공급자가 아니라 관광소비자의 입장에서 보니 올레길이 보이더라"는 명언을 남겼다.

제주올레길이 대한민국 최고의 관광지로 선정되더니 여기저기서 길을 내기 시작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제주 올레길을 낳고, 제주 올레길이 지리산 둘레길을 낳고, 또 강릉 바우길을 낳고, 서울 둘레길에 이어 송파 둘레길로 이어지는 식이었다.

한번은 관광분야 벤처기업을 선정하는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춘천 의암호에 카누를 띄우겠다는, 한 청년창업자가 군계일학이었다. 몇 년이 지난 후 아침 출근길이면 어김없이 '춘천에 가면 아빠와 함께 카누를 타보세요'라는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한, 그 젊은 창업자의 벤처기업이 바로 '춘천 물레길'이었다. 그 다음 해엔 대학을 갓 졸업한 여성 창업자를 만났는데, 지리산 둘레길을 따라 막걸리 양조장을 순례하는 '술례길'을 만들겠다고 했다.

이렇게 이어가다 보면 길이 길을 낳고, 또 새로운 길들이 부지기수다. 큰 길이나 작은 길, 산길이나 물길, 여럿이 걷는 길이나 혼자 걷는 길이 끝도 없겠다. 길은 모두 다르지만 자신이 서 있는 길에서 새로운 길이 시작되고, 길 위에서 길을 만드는 걸 배운다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에서 환상적 리얼리즘 작가로 꼽히는 이제하 선생의 단편소설이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이다. 10년 전 즈음에 선생을 만났을 때다. 나무 젓가락을 이용해서 문지시인선의 표지모델들을 다 그렸다는, 선생의 환상적인 얘기에 재미 붙이다보니 그 동안 묻고 싶었던 '나그네는 왜 길에서 쉬지 않는가?'를 까먹었다. 이제 구순이신데 지금도 10년 전처럼 길에서 기타를 치며 버스킹을 하고 계시는지 모르겠다. /임경수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교수/성인학습지원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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