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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9 (금)

이슈 검찰과 법무부

[취재파일] 검찰-대통령의 역설, 그리고 정의의 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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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사의 역설>

한 마을의 이발사가 이렇게 선언했다.

“앞으로 나는 자신의 수염을 ‘스스로 깎지 않는’ 모든 사람들의 수염을 전부 깎아줄 것이다. 다만, 자신의 수염을 ‘스스로 깎는’ 사람은 깎아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이 이발사의 수염은 누가 깎아줘야 하는가?

다른 사람이 이 이발사의 수염을 깎아주면, 이 이발사는 수염을 ‘스스로 깎지 않는’ 사람에 속하게 되므로, 본인의 선언에 따라 자신의 수염을 깎아야 한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의 수염을 깎게 되면 이 이발사는 또한 수염을 ‘스스로 깎는’ 사람에 속하게 되어버려, 본인의 선언에 따라 자신의 수염을 스스로 깎을 수 없는 역설이 생긴다.

이 이발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신과 관련될 때 생기는 논리의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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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런드 러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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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수학자이자 철학자, 논리학자인 버트런드 러셀은 1901년, 논리학의 유명한 ‘러셀의 역설’을 발표하며 위의 ‘이발사의 비유’를 들었다. 수학자인 파파디미트리우와 독시아디스는 만화 형식의 소설책 <로지코믹스>를 통해 이 역설을 발견한 러셀의 지적 여정을 그려냈다. 실제 역사를 기반으로 한 이 책에서 러셀은 ‘철저하고도 엄격하게 논리적인’ 이성의 토대를 찾으려는 여행을 떠난다. 1+1=2 라는 것 명제조차 수십 페이지에 이르는 엄격한 논증이 필요하다고 믿는 러셀은, 극한의 토대를 찾는 여정에서 '논리'가 내재하는 필연적 모순을 맞닥뜨린다. 그리고 그 모순은 '이발사의 역설'에서처럼, 자기 자신과 관련한 것들에서 쉽게 발생한다는 점도 발견하게 된다.
러셀과 같은 고매한 사상가들에게 비할 바는 아니겠으나, '이성'의 이웃사촌인 '정의' 영역에서 확고 불변한 실체를 규명하고자 나섰던 이들이 있다. 지금은 여러 피의자ㆍ정치인들과 스무고개를 하며 온갖 공격에 대응하는 처지가 됐지만, 불과 2년 전 국민들은 '공정과 상식', '정의 실현'의 모토를 내걸었던 '검찰' 조직 수장을 대통령으로 뽑았다. 모르긴 몰라도 그 결정을 내린 사람들의 마음 속 어딘가에는 '검찰'이라는 기관이 보증하는 '정의'의 이미지가 조금이나마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일부이자 상징이었던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 주변에 문제가 생기면서, 대한민국 검찰은 탄생 이래 가장 역설적인 상황에 놓일 위기에 처했다. 위 '이발사의 역설'에 몇 가지 가정을 넣은 이른바 검찰-대통령의 역설을 생각해보자.

<검찰-대통령의 역설>

검찰이 이런 방침을 세웠다.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밝히지 않는’ 존재들의 잘못은 직접 조사/압수수색 등 가용한 방법을 모두 동원해 철저히 수사할 것이다. 다만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밝히는’ 경우에는 그렇게까지 수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나라의 대통령은 검찰의 수장 출신으로,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상당수 국민들로부터 검찰의 화신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고, 검찰 내부에서도 대통령의 성공과 조직의 명운을 연결해서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른바 '검찰-대통령' 개념이 형성돼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대통령과 삶의 공동체를 이루는 배우자가 범죄 혐의들에 연루됐다는 의심이 생기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검찰-대통령의 배우자 잘못은 누가 어떤 방식으로 밝혀내야 논리적으로 온당한 것인가?

역설을 해결하는 방법



러셀이 만든 ‘이발사의 역설’을 해결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사람’이 아닌 이발사가 수염을 깎으면 된다. '검찰-대통령의 역설’을 ‘논리적으로’ 해결하는 방법도 의외로 간단하다.

(1) 검찰-대통령이 아닌 존재가 잘못을 밝히기 위한 수사를 하거나
(2) 검찰이 곧 대통령이 아니면 된다. 즉 검찰-대통령이라는 유착 개념을 깨버리면 된다.

(1)의 방법은 지난해부터 정치권에서 논의되고 있다. 김건희 여사 특검을 비롯한 온갖 종류의 특검들을 출범시키자는 주장이다. 하지만 현실적 난점이 있다. 대통령 거부권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200석을 야권이 아슬아슬하게 확보하지 못한 것에 더해, 정권을 겨누는 이 거대한 수사들을 임시 기구인 특검이 온전히 해낼 수 있는지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2)의 방법이 성공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많은 이들이 의문을 표하고 있다. 이원석 검찰총장은 지난주, 서울중앙지검 수사팀에 김건희 여사 명품 가방 수수 의혹에 대한 신속하고 철저한 규명을 지시했다. 이 의혹만을 수사하는 단독 전담 수사팀을 꾸리라는 지시도 내려졌으나, 세간에서는 '뒤늦은 쇼'가 아니냐는 냉소적 반응도 많다. 한편으로는 검찰이 지난해 말, 도이치모터스 의혹 수사를 위해 영부인 소환 필요성을 주장하며 대통령실과 갈등을 빚은 점을 근거로 (2)의 실현 가능성을 점치는 이들도 있다. 어찌 됐든 (2) 방식으로 역설을 해결하는 관건은 '누가 보더라도' 확실한 방식으로 검찰-대통령 간 이어진 개념의 고리를 깨버리는 것이다. 검찰의 공정성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은, 명품 가방 수수 의혹의 직무 연관성이나 대통령 인지/신고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권력 최정점에 대한 철저한 수사가 있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이발사의 역설'을 논리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이발사’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할 수 없게 된다. 마찬가지로 '검찰-대통령'의 역설을 해결하지 못하면 ‘공정한 수사기관으로서의 검찰'이라는 개념은 더 이상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가 없다. 사회적으로는 (1)의 방법이 됐든 (2)의 방법이 됐든 어쨌든 지금 빚어지고 있는 역설만 해결되면 그만이겠으나, 역설의 당사자인 검찰에게는 얘기가 좀 다르다. (2)의 방법에 대한 시도 없이 (1)의 방법만으로 상황이 풀려나간다면, '검찰-대통령' 개념의 늪에 빠진 검찰은 존재 이유에 대한 심각한 질문을 받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복잡한 정치 이야기나 인물들 간의 역학 관계는 빼고, 논리적으로 사안을 바라봤을 때 그렇다는 얘기다.

이성과 정의의 극한, 그리고 지혜를 가능하게 하는 것



이 역설을 풀기 위해 논리 구조 바깥에서 중요하게 생각해봐야 할 지점이 있다.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다시 러셀과 천재들의 이야기를 다룬 책 <로지코믹스>로 돌아가 보자.
이 책은 이성과 광기의 관계를 다룬 이야기이기도 하다. 러셀을 비롯해 이성과 논리의 극한을 추구하던 프레게와 칸토어 같은 당대의 천재들은 점점 스스로 미쳐가는 자신들을 발견한다. 극한 이성의 추구가 광기로 귀결되고야 마는 삶의 역설은 이들 천재들도 피해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실제로서의 삶'은 이성과 광기 그 어디쯤에서 역설과 모순을 딛고 가능해지는 것일까? 책은 그리스의 비극 <오리스테이아>의 마지막 부분을 언급하며 끝난다.

"트로이 원정군 대장 아가멤논은 승리를 위해 자신의 딸을 제사의 제물로 바친다. 이에 격분한 아가멤논의 아내는 불륜 상대와 짜고 아가멤논을 살해한다.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는 이 사실을 알게 된 뒤 아폴론 신으로부터 어머니를 죽여 징벌하라는 지시를 받고는 딜레마에 빠진다. 복수를 할 것인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인가?
갈등하던 오레스테스는 결국 자신의 어머니를 죽이고, '피에 굶주린 사냥개들'이라 불리는 복수의 여신들이 깨어나 오레스테스의 피를 찾아 나선다. 오레스테스는 정의와 지혜의 여신 아테나에게 해결책을 구한다. 아테나는 오레스테스의 유무죄를 시민 배심원 투표에 부치지만 유무죄의 투표수가 같게 나온다. 이제 결정은 온전히 아테나의 몫. 복수의 여신들은 무죄를 결정하면 도시를 피로 물들이겠다고 협박하지만, 아테나는 어머니를 죽인 오레스테스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복수의 여신들은 자신들이 모욕당했다며 분노해 날뛰기 시작한다. 또다시 복수의 수레바퀴가 돌아가기 직전, 정의와 지혜의 여신 아테나는 복수의 여신들에게 '나의 도시에 머무르며 함께 시민들을 다스리자'고 제안한다."


정의와 지혜의 여신 아테나는 어머니를 죽인 오레스테스에게 무죄를 선고하면서도, 피에 굶주린 악의 화신들에게 지배권을 내어주는 정치적 결단을 내림으로써 아테네의 지혜로운 공존을 성취한다. 완벽히 이성적이지도 않지만, 또 광기에 휩쓸리지도 않은 그 결정은 아테네의 '정치'의 새로운 공리가 된다. <로지코믹스>의 저자는 이 결단을 이렇게 요약한다.
"지혜를 성취하려면 지혜가 아니라는 부분도 허용해야한다."

몇 년 전, 전직 대통령 2명과 그 일파들의 몰락으로 정의의 극한이 실현되는 걸 보는 듯 했던 사람들은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다. 역대급 비호감 대선이라는 큰 전투가 끝난 게 불과 2년 전이었지만, 그 전투의 승자는 패자였던 상대에게 지난달 총선 전투에서 궤멸적 타격을 돌려받았다. 사방에서는 이런저런 특검을 추진하자는 깃발이 나부끼고, 유력자의 소환조사와 기소 재판, 그리고 또다시 엇갈리게 될 유죄와 무죄가 이어질 태세다. 그렇게 우리 사회는 다시 한 번 '극한 정의'의 쳇바퀴에 올라탈 준비를 하고 있다.
그 끝에서 또 다른 광기와 공허를 마주하지 않기 위해, 우리가 발견해야 할 새로운 공리는 무엇일까? 정치는 연일 '수사(搜査)'를 외치고, '수사'의 과정과 결과물은 정치적 변수로 귀결되는 상황이 이어진 지 이미 오래. 경마 중계처럼 이어지는 수사 상황 중계를 지켜보는 것과 함께, 우리가 정말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은 따로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우리가 합의해야 할 ‘지혜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를 실천적으로 달성하려면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진=연합뉴스, 게티이미지코리아)

원종진 기자 bell@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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