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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5 (토)

[투데이 窓]무대, 물감의 시대에서 빛의 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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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박동우(무대미술가·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 교수)


아테네 한복판의 높은 언덕 아크로폴리스 정상에 고대 그리스의 대표 건축물 파르테논 신전이 있다. 그 남쪽 기슭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의 유적이 있다. 디오니소스 극장이다. 그 옆에는 더 온전하게 남아 있는 고대 로마의 야외음악당 헤로데스 아티쿠스 극장이 있다. 모두 밝은 대리석 건물이다. 로마에 있는 고대 원형극장 콜로세움도 밝은 대리석으로 덮여 있다.

그러나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한 고대 그리스 로마의 건축물들이 원래는 화려한 색상으로 칠해져 있었음이 연구결과 밝혀졌다. 수많은 대리석 조각상도 당시엔 채색돼 있었는데 오랜 세월이 그 물감을 지워냈다고 한다. 극장들도 마찬가지다. 경복궁과 불국사의 화려한 단청도 덧칠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그 색을 잃어버리듯 고대 극장의 색깔도 그렇게 사라져 갔을 뿐이다.

서기 4세기부터 로마와 유럽은 기독교적 세계관에 지배되기 시작했고 극장 활동은 금지됐다. 그로부터 1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버려진 극장에 칠해진 물감은 희미해지다 결국 색을 잃었다. 다시 극장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16세기 말 피렌체에서 발명된 오페라는 17세기 베니스를 거쳐 18세기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오페라와 함께 진출한 이탈리아의 무대미술가들은 유럽 각지에서 오페라극장을 설계하고 무대장치를 디자인했다. 르네상스의 원근화법에 통달한 그들의 무대미술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신화를 소재로 극작한 대본을 뛰어넘을 만큼 정교하고 화려했다. 많은 무대화가가 무대보다 넓은 작업장에서 캔버스 천에 붓으로 화려한 색상의 그림을 그렸다. 조명가들은 촛불과 등잔불로 각종 조명기구를 만들어 무대장치를 밝혔다. 평면 무대장치에 진짜 같은 그림을 그리는 '물감의 시대'였다.

평면과 물감의 시대는 서서히 입체와 빛의 시대로 옮겨갔다. 20세기 초 스위스의 아돌프 아피아는 계단과 기둥 등 입체적 무대장치에 빛의 각도와 색상을 이용해 다양한 장면을 만들어냈다. 영국의 고든 크레이그는 무채색의 추상적 구조물들을 가변적으로 조합하고 거기에 조명을 비춰 천의 얼굴을 가진 무대장치를 디자인했다. 무대미술은 20세기 중반에 또 한 번 혁신을 맞이했다. 체코의 무대미술가 요셉 스보보다는 빛을 재료로 무대를 디자인했다. 연기와 빛으로 기둥을 만들고 다수의 환등기(프로젝터)를 사용해 허상의 무대장치를 공간 속에 만들어냈다. 무채색의 구조물들은 조명과 영상투사에 의해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장면마다 재탄생했다. 체코 정부는 그를 위해 라테르나 마지카(환등기)라는 극장을 지어주었다. 지금도 4년마다 열리는 세계 무대미술 전시회 '프라하 콰드레날레'를 보러 전 세계 공연인이 체코로 몰려든다.

21세기 들어 '빛의 시대'는 가속화했다. LED 디스플레이가 그 촉진제다. 모닥불(광원) 옆에서 손가락(매체)으로 동굴 벽(스크린)에 그림자를 만들며 놀던 원시시대의 영상은 이제 광원+매체+스크린이 일체화한 LED 시대를 맞아 획기적으로 변했다. 최근 라스베이거스에 직경 151m의 지구 모양으로 건축된 1만8600석의 공연장 MSG 스피어는 내부는 물론 건물의 외관 전체가 LED 패널로 덮여 있다. 영상을 끄는 순간 검은색으로 변하는 이 건물은 빛의 시대를 대표한다.

물론 아직도 많은 무대에서 물감이 쓰인다. 무대기술은 누적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새로운 기술에 밀려 과거의 기술이 도태되는 일반 산업계와 달리 첨단과 원시가 한 무대에 공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대에 흙을 깔아놓고 진흙탕에서 첨벙거리는 배우를 첨단 무빙라이트로 조명하기도 한다. 공연은 스토리 텔링을 넘어선 '스토리 프리젠팅'이다. 춘향전과 햄릿을 스토리가 궁금해서 보는 것이 아니다. 이미 알고 있는 스토리를 어떻게 새로운 해석과 창의적 기법으로 표현하는가를 보기 위해 극장에 가는 것이다.

박동우 무대미술가·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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