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 총선 취재를 위해 현장을 찾을 때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말이었다. “어떤 공약을 원하느냐”고 물어도 답은 늘 같았다. 전북 전주에서 만난 60대 여성은 “아니 봐요, 어떻게 해서 국민을 살릴까 상의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헐뜯고 쌈박질만 하고 앉았어”라고 혀를 찼다. “기자 양반이 싸움 좀 말리라”는 말도 숱하게 들었다. ‘이번엔 정책 대결에 초점을 맞춰야지’ 마음먹고 나선 취재길이었기에 싸늘한 주민 반응은 매번 참 씁쓸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왼쪽)이 지난 7일 충남 서천군 서천특화시장에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같은날 서울 서초구 양재역 인근에서 유세하고 있다. 연합뉴스·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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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차가운 반응을 누가 만들었을까. 유세차 앞에서 노트북을 펴고 받아치는 게 일상이었던 기자는 주변에 혹시 어린아이가 있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총선이 역대급 혐오 선거를 넘어 ‘19금’ 수준으로 전락하면서 유세장에서도 19금 수위의 발언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발단은 막말 논란에 휩싸인 김준혁 더불어민주당 경기 수원정 후보였다. 그는 과거 유튜브 방송 등을 통해 ‘이화여대생 미군 성 상납’, ‘연산군 스와핑’ 등 민망한 발언을 쏟아냈다. 이런 발언이 알려지자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유세 현장에서 “제 입이 더러워지겠지만”이라는 말을 붙여가며 마이크를 잡고 김 후보의 발언을 읊었다. 물론 “김준혁 같은 사람을 그대로 (후보로) 유지할 거면 ‘바바리맨’을 국회로 보내라”(지난 4일 서울 강동구 유세)는 식으로 김 후보 비판에 방점이 찍혔지만, 확성기를 타고 말이 퍼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지난 8일 경기 성남 분당 유세 땐 “어린이들이 와 있으니까(안 읊겠다.) 공공장소에서 인용도 못 할 정도로 ‘삐 소리’ 나는 말”이라며 자체 검열을 하기도 했다.
그런 한 위원장도 ‘삐 소리’에서 자유로운 건 아니었다. 한 위원장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를 향해 “정치 개같이 하는 사람”(지난달 29일 서울 서대문구 유세)이라고 했다가 논란을 일으켰다. 지난 7일 충북 청주 유세 땐 김 후보를 겨냥해 “성희롱하는 새…”까지 말했다가 급히 말을 주워 담기도 했다.
물론 이 대표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지난 2일 서울 동작구 유세 중 나경원 국민의힘 서울 동작을 후보를 향해 ‘나베(나경원+아베)’라고 표현했다. 민주당 지지자 사이에서 최근 “냄비(일본말로 나베)는 밟아야 제맛”이라는 홍보물이 퍼져 ‘성 비하’ 논란이 일었는데, 이를 인용한 것이다. 냄비가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 사이에서 여성을 성적으로 비하하는 은어로 쓰이는 걸 이 대표는 과연 몰랐을까. 설혹 몰랐다 하더라도 대선 후보까지 지낸 제1야당 대표가 상대 후보를 비하하는 말을 스스럼없이 썼다는 게 서글픈 일이다.
이 대표는 또 “4·3 학살의 후예라 할 수 있는 정치 집단이 국민의힘”(지난 3일 제주 4·3 추념식)이라고도 했다. 이에 한 위원장은 “이 대표가 일베(극우 성향 온라인 커뮤니티 일간베스트) 출신”(지난 3일 강원 춘천 유세)이라고 맞받았다. 거대 양당의 대표가 같은 날 ‘막말 배틀’을 벌인 셈이다.
저주도 난무했다. 윤영석 국민의힘 경남 양산갑 후보는 지난 7일 유세 중 “문재인 죽여야 돼”라고 극언을 해 논란이 됐다. 옥중 출마한 송영길 전 의원이 이끄는 소나무당은 ‘윤석열 대통령 사형’과 같은 황당한 공약을 내놨다. 윤석열 대통령의 ‘대파 875원’ 발언을 비꼬는 대파, 이재명 대표와 배우자 김혜경씨의 법인카드 유용 의혹을 상징하는 법카 등의 투표소 반입을 놓고 여야가 싸우기도 했다. “이러니 개그콘서트가 망했다”는 댓글이 달릴 정도로 정치가 희화화되는 순간이었다.
여야가 강대강 대치를 하는 사이 유세 현장은 점점 일반 유권자와는 거리가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노트북 자판을 열심히 두드리다 고개를 들어보면 파란색과 빨간색 ‘깔맞춤’ 옷차림의 강성 지지자와 카메라 장비를 손에 든 정치 유튜버만 유세차 앞에 모여든 모양새였다. 선거 막바지가 되자 어수선한 유세 일정이 끝나고 철퍽 주저앉은 자리에서 일어날 때면 습관적으로 고개를 돌리게 됐다. ‘어린아이들이 유세장 근처에 있었던 건 아니겠지’ 하고 말이다. 시작도 안 한 22대 국회, 벌써부터 걱정이다.
장서윤 기자 jang.seo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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