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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6 (토)

이슈 책에서 세상의 지혜를

태화관이 여자대학 된 이유...식민 조선에도 '여학생'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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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관에 묻힌 여성사 발굴한 김태은 작가
'3·1 민족성지 태화관은...' 전자책 발간
"'복원위' 출범, 잃어버린 여성 목소리 찾을 것"
한국일보

전자책 '3·1 민족성지 태화관은 어떻게 여대가 됐나'를 출간한 언론인 출신 김태은 작가가 20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김예원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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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관을 3·1운동 발상지로만 알고 있나요? 태화관은 '여성에 의해, 여성을 위한, 여성의 공간'으로 변화를 거듭해 여성사의 한 축을 담당했어요. 그런데 역사책에 한 줄도 언급되지 않아요. 이 사실을 찾아내 기록하는 일이 운명처럼 다가왔어요."

최근 전자책으로 재출간된 '3·1 민족성지 태화관은 어떻게 여대가 됐나'의 저자 김태은(51) 작가의 일성이다. 5년 전 낸 책에서 그는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뒤 독립운동 성지로 자리매김한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정자(당시 '태화정')에서 어떻게 여학교가 탄생해 성신여대로 발전했는지를 추적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개정증보판으로 나온 이번 책에는 한 걸음 더 나가 그곳에서 어떻게 한국 여성 인권 운동 및 교육의 초석이 다져졌는지를 포착했다. 김 작가는 "이번에 책을 새로 내면서 부제를 '지워진 여성교육사 140년 추적'으로 바꾸고 관련 내용을 추가했다"며 "1921년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사회복지시설 '태화여성관'의 초기 모습을 들여다보면 한국 여성의 삶과 여성사 전반에 태화관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지 알 수 있다"고 강조했다.

책은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지 3년 뒤인 1921년 태화관 인근에 다양한 여성단체가 둥지를 틀고, 여성 교육의 산실로 자리매김하게 된 과정을 생생하게 살려낸다. 특히 1885년 기독교 미국 여성 선교사가 입국해 복지관을 세우고 한국인 부인들을 모아 교육한 사실 등 초기 여성 교육 현장을 복원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언론인 출신 작가가 6년에 걸쳐 당시 언론기사와 사료 등을 뒤져 찾아낸 노고의 산물이다. "독립운동의 후광이 지나간 자리에서 한반도 역사상 한 번도 제도권에서 이뤄진 적이 없는 여성에 대한 교육이 시작된 것이죠. '전도부인(여전도사)'이라는 근대 첫 여성직업이 생겨난 것도 이때였어요."

복지기관은 여성이 자체적으로 학교 설립을 요청해 세워진 교육기관인 태화여학교로 이어졌고, 1936년 기업가이자 화가인 이숙종이 태화여학교를 인수해 성신여대가 됐다. 성신여대 출신으로서 학교의 전사(前史) 복원 작업에 사명을 느꼈다는 김 작가는 "개화기 교육을 받고 새로운 세상에 눈뜬 여성들이 항일독립운동을 통해 여권을 자각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여성참정권을 획득하는 등 태화관이 여성 해방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변모한 과정을 추적하는 과정은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며 "근대 여성 교육의 역사를 아우르다 보니 결국 140년에 가까운 한국여성교육사를 정리하는 작업이 됐다"고 회상했다.

김 작가는 3·1운동 105주년을 맞아 '태화성신연혁복원위원회' 출범을 추진한다. "태화관이 하나의 여자대학으로 발전하기까지 역사를 추적한 것이 결국 한국근대여성사가 됐어요. 과거 100년 동안 여성들의 작은 움직임들이 어떻게 연대를 만들고, 역사의 동력으로 작용했는지 꾸준히 발굴하고 발언할 생각입니다."
한국일보

인사이트브리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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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효숙 기자 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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