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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3 (토)

[중국 성어로 세상 읽기](10) 늙은 말이 길을 안다 - 노마식도(老馬識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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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경제

[유재혁 에세이스트]




대기업집단에서 70년대생 CEO에 90년대생 임원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나이보다 성과를 내세운 세대교체의 바람이 거세다. 세대교체 바람의 이면에는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짐을 싸야 하는 직장인들의 아픔이 있다. 평균 퇴직연령이 50세 남짓이다. 정년보다 이른 나이에 직장에서 내몰리는 현실을 이르는 '사오정'이란 신조어가 등장한지도 오래다. 사오정은 '45세가 정년’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고용구조가 경직된 우리사회에서 한창 일할 나이의 이들을 받아주는 곳은 별로 없다. 재취업이 막힌 이들이 결국 울며 겨자먹기로 선택하는 것이 자영업이다. 자영업은 대표적인 레드오션이다. 그런데도 너도나도 자영업에 뛰어든다. 그것 말고는 달리 할 게 없기 때문이다. 진입장벽이 낮은 업종일수록 경쟁이 치열하니 망할 확률도 그만큼 높다. 개업 후 5년을 버티지 못하고 폐업하는 비율이 80%를 상회한다. 퇴직금에 집을 담보로 대출받은 돈을 보태 뛰어든 자영업에서 실패하면 기다리는 건 노후의 빈곤이다.

고령 취업자 수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70세 이상 연간 고용률은 지난해 처음으로 30%를 넘어섰다. 70대 세 명 중 한 명이 일하고 있다는 의미다. 옛날 같으면 은퇴해서 손주 재롱이나 보고 여생을 즐길 나이에 취업전선에 나선다는 건 우리나라 노후빈곤율이 OECD 가입국 중 가장 높은 현실과 맥이 닿아 있다. 실제로 70대가 취업에 뛰어든 가장 큰 이유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다. 문제는 고용의 질이다. 임금 수준은 낮고 노동 강도는 높아 청년층이 꺼리는 소위 3D(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업종이거나 정부에서 제공하는 공공일자리를 중심으로 고령층 취업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2015년에 개봉한 '인턴'이란 영화가 있다. 경험 많은 70세 인턴과 열정 많은 30세 인터넷 기업 CEO가 만나 윈윈하는 스토리로 인기를 끌었다. 인터넷 의류쇼핑몰을 창업해 직원 220명 규모의 기업으로 키워낸 젊은 여주인공이 사회공헌 차원에서 시니어 인턴 프로그램을 시작하면서 자신도 그 중 한 명을 개인 인턴으로 배정받았다. 인턴으로 재취업을 한 남주인공은 70세 노인이다. 40년을 다닌 전직 회사에서 쌓은 경험과 노하우, 친화력을 바탕으로 패기는 넘치나 연륜이 짧은 젊은 CEO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주면서 신뢰를 쌓고 멘토로 자리매김한다.

현실은 영화와 다르다. 그럼에도 동화 같은 이야기를 담은 영화에 호응이 컸던 건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같은 바람이 자리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노동시장이 경직된 우리사회에서 퇴직자나 은퇴자들이 자신의 전문성을 재활용할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젊음에는 노년에 없는 패기가 있고 노년에는 젊음이 가지고 있지 못한 경험과 지혜가 있으니 영화에서처럼 윈윈하면 좋을 텐데 말이다. 중국 고사에 늙은 말의 지혜를 빌려 위기를 극복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춘추시대의 첫번째 패권국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북방 소수민족 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연(燕)나라의 구원 요청에 친히 대군을 이끌고 출병했다. 일년 가까이 벌어진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를 거두고 귀국길에 올랐는데 눈 쌓인 어느 골짜기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식량은 바닥을 드러내고 군사들이 지쳐 죽을 위기에 처하자 특급 참모 관중(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우정의 대명사 '관포지교管鮑之交'의 그 관중이다.)이 고심 끝에 늙은 말의 특성을 이용해 보기로 했다. 늙은 말은 낯선 곳에서도 집을 찾아가는 능력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고삐를 풀어주자 아니나 다를까 늙은 말들이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닌가. 전군이 말들의 뒤를 바짝 따라갔고 마침내 골짜기를 벗어나 제나라로 돌아가는 큰길을 찾아냈다. '노마식도(老馬識途)', 즉 '늙은 말이 길을 알고 있다'는 성어가 만들어진 역사적 배경이다. 노마식도는 경험이 많은 사람이 일에 능숙하다는 뜻으로 쓰인다. 늙은 말의 지혜, '노마지지(老馬之智)'라고도 한다. 출전은 《한비자• 세림 상편(韓非子•說林上)》이다.

나이를 많이 먹었다고 해서, 살 날이 짧게 남았다고 해서 노인이 폄훼되고 사회적으로 차별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젊었을 때 국가와 사회를 위해서 기여를 했으니 나이 대접을 하라는 게 아니다. 체력이야 나이가 들수록 쇠퇴하고 젊은이들을 당해낼 수 없지만 스포츠가 아닌 바에야 세상 일을 어디 체력만 가지고 할 수 있겠는가. 일을 풀어나가는 데는 경험과 지혜가 필요하다. 나이를 먹을수록, 연륜이 쌓일수록 지혜는 깊어지고 경험은 풍부해진다. 말도 그럴진대 하물며 인간은 만물의 영장 아니던가.

로마 최고의 지성이라 불리는 키케로의 말을 들어보자. 그가 예순 두 살 무렵에 쓴 '노년에 관하여'는 카토라는 주인공 노인이 젊은이들에게 노년의 의미를 설명해 주는 책이다. "노년이 되면 일을 할 수 없느냐"는 질문에 키케로는 이렇게 답한다.

"노년이 되면 일을 못한다고 하는데, 과연 어떤 일을 말하는 것인가? 비록 육체는 노쇠할지라도 정신으로 이루어지는 노인의 일거리가 있다네. 예를 들어 항해를 한다고 생각해보세. 젊은이들이 돛을 올리고 갑판을 뛰어다니고 물을 배수시킬 때, 노인은 키를 잡고서 조용히 고물(船尾)에 앉아 있지. 그는 젊은이들이 하는 일을 하지는 않네. 그러나 진실로 더욱 중대하고 유익한 일을 하고 있지. 큰일은 육체의 힘이나 기민함이 아니라 깊은 사려와 판단력으로 하는 것이라네. 노년이 되면 이러한 특징들이 빈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풍부해진다네."

'백발은 인생의 면류관’이요 '노인이 가진 지식은 도서관의 책보다도 많다'고 했다. 포도주가 오래될수록 더 깊은 맛을 내듯 삶의 지혜는 노년에 이를수록 깊어진다. 저출산으로 노동력이 부족하고 고령화된 사회가 불가피한 미래라면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키워 노인의 경륜을 적극 활용하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60,70대는 산업화를 일군 역군들이다. 서툰 자영업으로 그나마 있는 재산 날리고 등산으로 소일하거나 한손에 집게 들고 휴지를 줍는 일이나 하기에는 그들의 경험과 지혜가 너무 아깝지 않은가.

유재혁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제일기획 근무(1985~2008) △'한국산문' 등단 (2019)

아주경제=유재혁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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