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7.27 (토)

상상, 그 이상! <듄: 파트2>가 펼쳐내는 스펙터클의 향연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이동윤 영화평론가(dongyunlee08@gmail.com)]
<듄: 파트2>가 드디어 베일을 벗는다. 작년 말 개봉 예정이었으나 미국배우조합의 파업으로 연기되어 많은 팬의 궁금증을 더욱 키워왔기에 작품을 향한 관심이 더욱 뜨겁다. 어떤 작품이든지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클법하지만 <듄: 파트2>는 무엇을 기대했던 그 이상의 영화적 쾌감을 선사한다. 애초에 영화가 ‘볼거리’로부터 시작했음을 돌이켜 본다면 <듄: 파트2>는 그 본질에 충실하면서 시각적 스팩터클이 곧 서사적 스팩터클로, 더 나아가 사회적 의미 해석에 대한 여러 담론으로까지 확장되는 극적 체험을 안겨 준다. 어떤 평가를 더한다 할지라도 <듄: 파트2>가 <반지의 제왕>(1999), <아바타>(2003)의 비주얼 쇼크를 넘어서는 또 하나의 신기원을 이룬 작품으로 평가될 것임엔 분명하다.

<듄: 파트2>는 코리노 제국의 황제와 하코넨 가문의 기습 공격으로부터 간신히 목숨을 건진 폴이 아라키스 사막을 지배하는 프레멘 종족과 만난 <듄: 파트1>의 마지막 장면으로부터 서사를 시작한다. <듄: 파트1>이 아트레이더스 가문의 몰락 과정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면 <듄 파트2>는 폴이 퀴사츠 헤더락, 아라키스 사막에서 살아가는 남부 프레멘들의 신앙 속 구원자이기도 한 '리산 알 가입'(외계에서 온 목소리란 뜻으로 메시아를 의미한다)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다. 물이 풍부했던 칼리단으로부터, 사막으로 둘러싼 아라키스에 도달해 가족을 잃고 종교적 신화 속에만 존재했던 불멸의 존재로 거듭나는 폴의 모든 여정 중심에는 '스파이스'가 존재한다. 아라키스 사막에 넓게 퍼져 있는, 한편으로는 황금처럼 보이기도 하고 쓰임새는 석유 같기도 한, 인간의 정신까지 좌우할 수 있는 대체 불가능한 물질. 그 물질을 소유하려는 제국의 욕망이 폴의 가문인 아트레이더스를 멸망 시키고 전 우주를 구원할 퀴사츠 헤더락으로 폴을 내몬다.

스파이스가 현실적으로 무엇에 대한 은유이든, '듄'의 세계관 속에서 스파이스는 제국을 유지할 수 있는 토대이자 생산 자원이며 자본 그 자체다. '듄'의 세계는 스파이스를 중심으로 권력관계가 양분되며 스파이스의 소유권이 과연 누구에게 있는가를 두고 끝없는 투쟁을 이어간다. <듄: 파트1>이 그 통제권을 잡기 위한 제국의 황제와 하코넨 가문의 모략을 중심에 뒀다면 <듄: 파트2>는 스파이스를 착취하려는 제국과 하코넨 가문으로부터 자신의 땅을 지키려 노력하는 프레멘의 활약이 중심을 이룬다. 폴은 그들의 모든 대결 구도 중심에 위치한다.

폴의 아버지, 레토 공작(오스카 아이작)은 애초에 칼리단에서 아라키스로 이주하라는 황제의 명령이 자신의 가문을 공격하려는 계략임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라키스의 사막을 지배하고 있는 프레멘과의 협업을 통해 그곳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대신, 관리하고 운영해 나갈 계획을 세운다. 스파이스를 발굴하기 위해 그곳의 토착민인 프레멘까지 모두 죽이려 했던 하코넨과는 사뭇 다른 태도다. 듄은 이러한 아버지의 뜻을 <듄: 파트2>에서 실현한다. 그는 전적으로 프레멘과 같은 위치에 서기 위해 노력하고 그들이 제시하는 시험들을 하나씩 통과해 가며 자신의 진심을 전달한다.

프레시안

▲사막을 응시하는 폴 아트레이더스(티모시 샬라메). ⓒ워너브로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드니 빌뇌브 감독은 스파이스를 중심으로 벌어진 두 세력의 이미지를 수직과 수평적 구도에서 그려낸다. 스파이스를 폭압적 방식으로 착취하려는 하코넨과 그 세계를 암암리에 지배하려는 베네 게세리트의 미장센은 주로 수직적 구도로 표현된다. 인간의 뼈를 형상화한 호코넨 별, 기에디 프라임의 수도 바로니는 H.R. 기거의 작품을 연상시키며 기괴한 그로테스크함을 과시한다. 프릿츠 랑 감독의 <메트로폴리스>(1927)를 연상시키는 미장센을 강렬한 흑백의 대비로 펼쳐낸 시퀀스에서 감독은 수직적 구도로 상징되는 하코넨의 세계가 죽음과 폭력, 무의 세계임을 선보인다. 반면 사막에서 살아가는 프레멘의 세계는 수평적 구도에서 펼쳐진다. 사막은 그 어떤 대상도 쉽게 살아남기 힘든 척박한 땅이다. 역사적으로도 서구 유럽 제국은 동방을 정복하려다 매번 사막에서 고비를 맞이하곤 했다. 그 어떤 문명도 넘보지 못했던 사막이 누군가의 삶의 터전일 수 있음을 감히 상상조차 못하던 이들에게 프레멘의 삶은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또 다른 겸손함을 엿보게 한다. 그런 땅에서 모두가 평등한 관계를 이루고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폴의 마지막 통과의례, 샌드웜 라이딩 장면. 워너브로스

폴은 그 중심에 서서 수직과 수평의 구도를 종합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이를 가장 잘 표현한 시퀀스는 샤이 훌루드(모래 벌레)를 타고 사막을 가로지르는 '샌드웜 라이딩' 장면이다. 프레멘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폴이 마지막으로 넘어야 하는 통과의례인 샌드웜 라이딩은 프레멘 족이 어떻게 샤이 훌르드와 더불어 살아가는지, 사막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그 존재와 협업하는지 잘 보여주는 하나의 예이다. 드니 빌뇌브 감독은 샤이 훌르드 위로 뛰어올라 위태롭게 매달리는 폴의 이미지를 수직적 구도 속에서 잡아낸다. 수평으로 빠르게 이동하는 샤이 훌루드의 속도감이 폴에게 강한 저항으로 느껴지기 위한 효과적인 구도다. 위험 속에서 결국 샤이 훌르드의 몸체와 하나로 연결되는 순간, 화면은 공중 부양하듯 날아올라 광활한 사막의 모래밭을 화면 가득 채워 넣는다. 아이맥스(IMAX) 디지털 풀 프레임의 1.43:1 화면 비율을 최대한 활용하여 폴이 수평과 수직의 세계를 통합하는 순간이 포착된다.

프레시안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대기하는 스틸가(하비에르 바르뎀)와 프레멘 군사들. ⓒ워너브로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극단적인 두 세계를 통합하는 폴의 역할은 <듄: 파트2>에서 더욱 돋보인다. 프레멘 족에게 받아들여지는 과정에서 폴은 그들 내부 또한 남과 북으로 대립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호전적이고 이성적이며 자신의 땅이 침략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북쪽 프레멘과 달리 남쪽 프레멘은 근본주의자로서 베네 게세리트가 퍼트려 놓은 종교적 신화 속에서 끊임없이 메시아를 기다리고 갈망한다. 이 둘은 아라키스를 지키기 위해 서로 협력하지만 폴과 그의 어머니 제시카(레베카 퍼거슨)가 등장하자 그들의 존재에 대한 해석을 놓고 갈등한다. 폴은 결국 이들 또한 하나로 통합하여 그들 사이에 메시아로 우뚝 선다. 역사가, 신화가 결정지어 놓은 운명의 굴레에서 폴은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드니 빌뇌브 감독은 그것이 과연 신의 의지에 무릎 꿇은 것인지, 아니면 종교적 이데올로기를 역설적으로 이용하여 아버지에 대한 복수와 제국 제패에 대한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는 것인지 해석을 열어 둔다. 비극적 미래를 따르지 않으려는 몸부림과 영웅이 되어야만 하는 운명의 충돌 사이에서 폴은 내적인 갈등을 겪으며 점차 영웅으로 등극한다. <듄: 파트2>의 시각적 스펙터클이 서사적 스펙터클로 확장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폴의 내적 갈등이 강력한 드라마로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드니 빌뇌브 감독은 '듄'의 대서사를 삼부작으로 완성 짓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듄: 파트1>이 발표되었을 때 원작을 읽은 팬들은 총 6권에 달하는 방대한 이야기 중에서 겨우 1권의 중간부까지 담아낸 결과물에 적지 않게 당황했다. <듄: 파트2>를 통해서 1권을 마무리 짓고 <듄: 파트3>에서는 두 번째 권에 해당하는 <듄의 메시아>를 기반으로 완성하겠다고 했으니 감독은 애초에 원작의 방대한 분량을 모두 영화에 담을 의도가 없었다. 오히려 그 누구보다 '듄'의 광팬으로 알려진 그 스스로 작품을 통해 바라본 자신만의 시선을 영화로 표현하겠다고 처음부터 결심한 것일 수 있다. 원작 팬들의 원성을 감내하고서라도 이 작품을 과감히 2권에서 마무리 짓겠다고 판단한 이유일 것이다.

프랭크 허버트는 초인적 영웅에 대한 불신과 반감을 품고 이 작품을 완성했다. 한 개인에게 압도적인 힘이 부여되었을 때 그 힘이 어떻게 세계를 파멸시켰는지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이미 여러 번 배웠다. 직접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프랭크 허버트에게 이러한 판단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과연 드니 빌뇌브가 바라보는 초인적 존재에 대한 관점은 어떠할까? 자본의 전 지구화 속에서 인종, 젠더, 난민 갈등이 극심해져 가는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드니 빌뇌브는 과연 어떤 관점에서 초인적 존재를 재해석 해낼까? <듄: 파트2>에서 폴이 자신의 능력을 자각한 이상 그 결과는 마지막 편에서 확인가능할 것이다. 극단적인 두 세계를 통합하는 존재로서의 폴이 펼쳐낼 성전 전쟁의 장대함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프레시안

▲<듄: 파트2> ⓒ워너브로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동윤 영화평론가(dongyunlee08@gmail.com)]

- Copyrights ©PRESSian.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