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 캔터베리 대성당의 '베켓의 왕관' 예배당. DAVID ILIFF/라이선스 CC BY-SA 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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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개혁의 동반자였습니다. 새 시대를 향한 포부를 공유하고 부패한 권력에 맞서자며 의기투합했지요. 믿음은 끈끈했습니다. 신뢰로 맺어진 인연은 끊을 수 없는 혈연만큼이나 견고합니다.
'빛의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권력의 최정상에 오르면서였습니다. 순풍을 탄 배처럼 개혁은 완성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자리는 사람을 오염시키기 마련인 걸까요. 기득권이라는 열매가 '개혁의 형제 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 의견은 충돌했고, 드잡이하는 일도 잦아집니다. "권력욕에 사로잡힌 부패한 세력"이라고 서로를 비난하기도 했지요. 우정의 맹세는 저주의 언어로 바뀌고, 서로를 바라보는 신뢰의 눈빛은 이제 경멸로 가득합니다. 주인공은 12세기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와 대주교 토머스 베켓입니다.
오래전 잉글랜드의 얘기만은 아닙니다. 형제와 같던 개혁의 동지들이 적으로 마주하는 일은 900년의 시차를 두고 이 땅에서도 재현됩니다. 유럽의 옛이야기를 애써 꺼내는 이유입니다.
영화 '베켓'에서 토머스 베켓(왼쪽)과 의견을 나누는 헨리 2세. IM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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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종교의 분쟁
"교회가 가져간 수입이 도대체 얼마란 말이냐?"
1154년 즉위한 잉글랜드 왕 헨리 2세는 개혁가였습니다. 종교 권력에 밀려 미약해진 왕권 강화를 시도했지요. 당시 교회는 영지를 가질 수 있었고 신도들에게서 세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돈은 모두 가톨릭의 성지 로마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그만큼 왕의 권리는 제한됐지요. 교회의 영지가 커질수록 왕의 영토와 수입은 줄어드는 구조였습니다. 무력으로 교회를 위협하더라도 부질없는 일이었습니다. 교회에는 막강한 '파문'의 권한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아무리 잘나가는 왕이더라도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하면 권력의 지지 기반을 잃게 됐습니다.
가톨릭과 유럽 왕실의 권력이 불화한 배경입니다. 종교를 향한 믿음이 강할수록 왕권은 약화되는 '제로섬' 게임이었지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카노사의 굴욕' 역시 정치와 종교 간 불화로 빚어진 파열음이었습니다.
교회 최고 권력에 자신의 사람을 심다
"베켓, 나와 함께 일해보겠나."
헨리 2세는 영리한 지도자였습니다. 묘수를 고안해냈지요. 잉글랜드에서 가장 높은 가톨릭의 자리인 캔터베리 대주교, 여기에 자기 사람을 임명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재판관 출신 베켓이 그 주인공이었지요.
베켓은 귀족 집안의 자제로 1119년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프랑스 노르망디 출신으로 왕실의 믿음을 받고 있었습니다(잉글랜드 왕조 역시 노르망디 영주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귀족 집안은 아들 중 한 명을 성직자로 키웠기에 베켓도 어린 시절부터 성직 수업을 받았지요.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우정을 나눈 건 1155년이었습니다. 헨리 2세가 재상 자리에 베켓을 낙점하면서였습니다. 일머리가 빠른 데다 제법 존경받는 종교인이었기 때문이지요. 집안도 자신과 같은 노르망디 귀족 출신이었고요. 국가·왕과 관련된 일을 맡기기에 최적의 인물이었습니다.
시작부터 합이 좋은 '콤비'였습니다. 왕이 하고자 하는 개혁을 베켓은 훌륭하게 수행해냈지요. 100을 주문하면 200을 소화하는 인재였습니다. 국정을 돌볼 때도, 사냥을 나갈 때도, 술을 마실 때도 두 사람은 늘 함께였습니다. 헨리 2세가 자신의 자녀를 베켓의 집안에 보내 교육시켰을 정도였으니까요.
1161년 캔터베리 대주교 테오발드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잉글랜드 남부 교구를 총관할하는 종교의 핵심적인 자리이자 수도 런던까지 담당했기에 왕과 버금가는 권력을 누리는 자리였습니다.
헨리 2세는 기회를 포착합니다. 캔터베리 대주교 자리에 자기 사람 베켓을 앉히려는 계획을 세웠지요. 왕권을 위협하는 종교 권력에 자신의 심복을 심으려는 속셈이었습니다. 1162년 6월 2일 베켓은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었습니다. 잉글랜드의 모든 사람은 생각했습니다. "이제 잉글랜드 교회는 모두 헨리 2세의 것이겠군."
내 사람인 줄 알았던 그가…어쩐지 수상하다
"저는 이제 신의 사람입니다. 세속 권력에 굴하지 않겠습니다."
헨리 2세는 베켓이 자기 사람이라고 믿었습니다. 캔터베리 대주교가 돼서도 왕권에 힘을 실어줄 것이라고 확신했지요. 기대는 산산이 부서집니다. 대주교가 된 베켓이 철저히 교회의 이익에 봉사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재상 시절 화려한 옷을 입고 왕과의 우정을 과시하던 베켓은 더 이상 없었습니다. 성직자의 소박한 옷을 입고 고행을 마다하지 않는 종교인의 모습만 보였습니다. 헨리 2세의 불안감은 커집니다. "내가 알던 베켓이 아니야."
두 사람이 정면충돌한 건 '클래런던 칙령'을 두고서였습니다. 당시 유럽에서 성직자는 세속 법정 대신 교회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헨리 2세는 이를 마뜩잖아했지요. 이를 폐지하는 내용을 담은 법안이 클래런던 칙령이었습니다. 가톨릭 개혁의 핵심이자 왕권 강화를 위한 숙원 사업이었지요.
헨리 2세는 무력과 회유를 통해 다른 주교들의 찬성을 얻어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반대파 한 사람은 얄궂게도 캔터베리 대주교 베켓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명백히 '신의 사람'임을 증명했습니다. 최종 거부권을 행사하면서였습니다. 교회 권한을 축소한다는 건 신앙인인 그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요. 그는 헨리 2세의 동반자가 아닌 영락없는 '교회의 아들'이었습니다. 헨리 2세는 분노에 차 그에게 추방을 명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두 사람
헨리 2세는 고민에 빠집니다. 그의 가톨릭 개혁이 지지부진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걸림돌은 옛 친구 베켓. 그는 수하들이 모인 자리에서 조용히 읊조립니다. "Will no one rid me of this turbulent priest?(이 문제적 성직자를 제거할 사람은 없는 것인가?)"
베켓의 이름을 말하지도, 직접 살인을 명령하지도 않았습니다. 주위에 있던 네 명의 기사는 그의 본심을 알아챕니다. 무장한 채로 캔터베리 대성당으로 향합니다. 베켓이 보입니다. 해진 옷을 입고 하느님을 향해 기도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기사들은 칼을 꺼내 그의 목을 잘랐습니다. 신의 대성당에서 켄터베리 대주교를 죽인 만행이었습니다. 그 유명한 '대성당에서의 살인'. 두 사람의 우정이 파국으로 끝난 셈입니다.
헨리 2세의 왕권은 이제 강화됐을까요. 그러지 않았습니다. 베켓의 사망은 전 유럽을 달궜습니다. 대성당에서 미사를 올리는 대주교를 살해하는 건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궁지에 몰린 건 헨리 2세였지요. 베켓은 신의 뜻을 지키기 위해 권력에 저항한 인물로 추앙받습니다. 전 유럽인이 캔터베리 대성당으로 순례를 왔을 정도였으니까요. 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그를 즉각 성인품에 올렸습니다. 인간 베켓은 죽었지만, 그는 영원한 성인(Saint)으로 부활했습니다.
라이벌 국가였던 프랑스 역시 잉글랜드를 공격하는 데 여념이 없었지요. 쏟아지는 비난에 헨리 2세는 정치적 위기를 맞았습니다. 베켓의 무덤에서 흰옷에 맨발로 공개 참회를 선언한 배경입니다. 밤샘 기도를 올리는 그에게 주교들이 와서 공개 채찍을 때렸습니다. 헨리 2세는 그저 입을 다물고 고통을 참아야만 했습니다. 이후에는 교회가 반대하면 어떤 법안도 도입할 수 없을 정도로 권력을 잃어갑니다. 왕권은 약해지고 교회의 권위는 더욱 올라갔습니다. 죽은 베켓이 산 헨리를 곤경에 빠뜨린 것이었습니다.
이탈리아 화가 주세페 베르밀리오가 1625년 그린 '토머스 베켓의 장례식'. 베켓은 죽었지만 유럽의 성인으로 존경받았다. 이는 헨리 2세의 정치적 위기를 초래했다. Giovanni Dall'Ort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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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2세와 베켓의 이야기는 재현된다
두 사람의 우정은 문재인 전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의 관계를 닮았습니다. 검찰 개혁의 동지로 시작해 정치적 숙적으로 끝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문재인 정부는 뒤늦게서야 '검찰' 윤석열을 막았지만, '대통령' 윤석열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헨리 2세가 '대주교' 베켓을 죽였지만, '성인' 베켓에게 크게 혼난 것처럼요. 1170년 잉글랜드와 2022년 대한민국의 평행이론인 셈입니다.
2024년 대한민국은 또다시 정치적 격변기에 섰습니다. 권력에 희생당함으로써 거물로 부활할 '베켓'이 다시 등장할까요. 독자 여러분의 상상에 맡깁니다.
역사 속 알롱달롱한 이야기를 생각하는 사색(史色)입니다. 소란한 세상에서 잠시 벗어나 역사의 숲으로 독자 여러분을 안내합니다. 재미 혹은 의미, 두 미(美) 중 하나는 반드시 챙기겠습니다.
[강영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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