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리포트] AI가 매긴 21대 국회 양극화 지수
11년간의 법안 5만7000건 분석… 최근 4년 ‘독단적 입법’ 32% 증가
유력 정치인 공동발의 ‘0건’, “협력하면 입지 약해질 뿐” 인식
전세사기 방지법도 여야 협력 無… 민생 미뤄 두고 법안으로 정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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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본 ‘21대 국회 양극화’
21대 국회의 ‘협치’ 수준이 19·20대 국회보다 낮아지면서 다른 정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함께 발의한 법안이 줄어들었다. 동아일보가 엄기홍 경북대 교수와 함께 인공지능(AI)을 활용해 19∼21대 국회 법안을 전수분석한 결과다.》
9일 오후 4시 서울 영등포구 국회 본회의장. ‘10·29 이태원참사 피해자 권리보장과 진상규명 및 재발 방지를 위한 특별법안’이 상정되자 조용했던 장내가 술렁였다. 2022년 10·29 이태원 참사에 대해 특별조사위원회를 꾸려 진상조사를 벌이는 내용의 법안에 반발해 국민의힘 의원들이 집단 퇴장한 것. 국민의힘 이만희 의원의 반대토론 발언은 장내 야유 때문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이날은 21대 국회 마지막 해에 열리는 첫 본회의였다. 한 주 전인 2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 피습 사건 이후 여야가 ‘증오 정치의 종식’을 한목소리로 약속했기에, 화합하는 국회의 모습을 기대하는 시민도 많았다. 하지만 이런 기대를 저버린 채 9일 본회의는 또다시 파행했다. 이를 지켜본 회사원 임준걸 씨(43)는 “이번 국회는 여야가 서로 ‘반대를 위한 반대’만 하다가 끝나는 것 같아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 ‘끼리끼리 입법’ 지수, 4년 새 32% 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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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국회 들어 서로 다른 정당 소속 의원끼리 교류 없이 법안을 발의하는 ‘끼리끼리 입법’ 성향이 과거보다 강해졌다는 인공지능(AI)의 분석 결과가 나왔다. 최근 11년여간 국회에 발의된 의원 법안 5만6951건을 전수 분석한 결과다.
동아일보 취재팀은 엄기홍 경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전 한국정당학회장)와 함께 19대 국회가 출범한 2012년 5월 30일부터 21대 국회 임기 만료를 약 10개월 앞둔 지난해 7월 24일까지 발의된 의원 법안의 대표 발의자와 공동 서명자의 소속 정당을 AI로 분석했다. 법안 공동발의는 협치의 수준을 가늠하는 대표적인 지표다.
그 결과 같은 정당 의원의 서명만으로 발의된 법안의 비율과 비례하는 국회 내 ‘양극화 지수’는 20대 때 1.94에서 21대 때 2.56으로 치솟았다. 4년 새 여야의 양극화 지수가 32%나 높아진 것.
대표적인 게 이태원 참사 특별법이다. 공동 발의자에 이름을 올린 의원 183명 중 국민의힘 의원은 1명도 없었다.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 그간 국민의힘이 낸 24개의 법안에도 민주당 의원은 3명만 서명했다.
● 유력 정치인일수록 ‘끼리 입법’ 비율 높아
21대 국회에서 다른 당과 공동 발의를 한 번도 하지 않은 의원은 총 6명이다. 해당 의원들은 자기 대표 발의에 다른 당 의원이 한 명도 서명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도 다른 당 의원 대표 발의에 서명한 적이 없다.
국민의힘에선 홍준표 대구시장이 의원 재직 당시 총 16건을 대표로 발의했지만, 참여자는 모두 국민의힘 소속이었다. 국민의힘 윤희숙, 정찬민, 김영선, 윤한홍 의원도 다른 정당과 공동 발의한 기록이 없었다. 민주당에서 다른 당 의원과 공동발의 기록이 없는 경우는 이재명 대표가 유일했다. 이 대표는 21대 국회에서 대표 발의를 총 6건 했지만 모두 민주당 의원들만 서명하고 다른 당 의원의 서명은 없었다.
당 대표와 원내대표 등 당 지도부를 맡거나 대선주자였던 당내 유력 인물들도 상황은 비슷했다.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는 21대 국회에서 16개의 법안을 대표 발의했지만, 무소속 의원 3명과 열린민주당 의원을 제외하면 모두 민주당 의원과 발의했다. 국민의힘 김기현 전 대표도 대표 발의한 44개 중 민주당 의원의 서명을 받은 법안이 없었다.
민주당 이낙연 전 대표는 2021년 9월 스스로 사퇴해 임기를 못 채웠지만, 그전까지는 김진애 당시 열린민주당 의원을 제외하면 모두 민주당 의원들과만 발의했다. 국민의힘 안철수 의원은 13개 대표 발의 중 민주당 의원 서명을 2번 받았다.
전문가들은 이런 경향성이 ‘주요 인사일수록 협력보다는 독자성을 내세워야 한다’는 인식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다. 김성수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당내 주요 인사들은 ‘다른 정당과의 협력은 향후 입지에 도움이 안 된다’고 여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 ‘전세사기 방지법’ 등 민생법안도 따로 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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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할 건 ‘끼리끼리 입법’의 경향이 정파성이 크지 않은 민생 법안에서도 나타났다는 점이다. ‘정인이 사건’ 때가 대표적이다. 생후 16개월 된 입양아가 학대로 숨진 2021년 ‘정인이 사건’ 이후 국민의힘과 민주당은 후속 대책 마련을 위해 관련 법안을 각 6건씩 발의했지만, 양당 간에 서명을 주고받은 법안은 없었다.
사회 초년생과 신혼부부 피해자가 많았던 전세사기를 예방하기 위한 법안을 발의할 때도 여야는 협력하지 않았다. 국토교통부가 전세사기 피해방지 대책을 발표한 2022년 9월 이후부터 지난해 7월까지 발의된 ‘주택임대차보호법 일부개정법률안’ 23건(정의당, 무소속 대표 발의 6건 제외) 중 국민의힘과 민주당 의원이 공동 발의한 법안은 없었다.
이는 4년 전 20대 국회와 비교하면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20대 국회에선 2017년 12월 21일 29명의 생명을 앗아간 충북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참사 등 주요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여러 정당이 협업해 피해 대책 법안을 발의했다. 당시 민주당 김영호 의원이 대표 발의한 ‘화재예방, 소방시설 설치·유지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 개정안에는 민주당 7명뿐 아니라 자유한국당 6명, 바른미래당 2명, 민주평화당 2명이 참여했다. 자유한국당 신상진 의원이 대표로 낸 ‘119구조·구급에 관한 법률’ 개정안에도 민주당 2명, 민주평화당 2명이 참여했다.
● 정쟁 도구된 법안들… 대통령 거부권만 ‘8건’
21대 국회에서는 법안이 협치보다는 갈등의 결과물인 경우가 많았다. 가장 극심한 갈등을 빚었던 법안 중 하나인 ‘간호법 제정안’은 국회 상임위원회 소위원회부터 본회의까지 사실상 여당 의원들의 부재 속에서 표결이 이뤄졌다. 지난해 4월 27일 국회 본회의에서 간호법 표결을 앞두고 국민의힘 의원들은 김예지 의원과 간호사 출신인 최연숙 의원 등 2명을 제외하고 모두 퇴장했다. 이러한 입법 과정은 보건의료계에 혼란과 갈등을 일으켜 의료계 파업까지 초래했다.
합의가 부재한 가운데 통과된 법안들은 대통령의 잦은 법안 거부권 행사로 이어졌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후 양곡관리법, 간호법 제정안 등 총 8개의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모두 국민의힘 의원이 집단 퇴장한 뒤 민주당 주도로 표결해 통과된 사례들이다.
반면 19, 20대 국회는 한쪽 당이 집단 퇴장하고 상대 정당 주도로 단독 표결 처리된 주요 법안이 각각 1건뿐이다. 19대 국회의 경우 2016년 3월 테러방지법이 민주당 의원 전원 퇴장 후 새누리당 주도로 통과됐다. 20대 국회는 2019년 12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 법안이 국민의힘 의원 전원 퇴장 후 통과됐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많았다는 것은 국회가 타협 대신 갈등이 가득하고, 대통령도 이에 동참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 “‘우리끼리 10명 채우자’는 분위기 강해져”
국회에서 실무를 맡은 보좌진들은 21대 국회 들어 다른 당과 협업하기가 쉽지 않은 분위기가 됐다고 말한다. 국민의힘 소속 의원실의 한 보좌관은 “21대 국회 들어 다른 당에 공동 발의 요청을 해도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어서 당 내부에서 발의하는 게 관행처럼 굳어졌다. 굳이 상대 정당에 부담을 주면서까지 요청하기도 눈치 보이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소속 의원실의 한 보좌관은 “이미 의석수가 많은 정당은 굳이 다른 정당을 통하지 않아도 충분히 10명을 채워서 공동 발의할 수 있다”며 “여야 쟁점이 아닌 법안은 공동 발의 요청서를 의원회관 지하에 있는 우편사서함을 통해 300여 명 의원 모두에게 보내기도 하지만 반응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행 이후 대면 접촉이 줄어든 영향도 있다고 본다. ‘전자 입법발의시스템’(전자 발의)은 2005년에 도입됐지만 거의 쓰이지 않다가 코로나19 영향에 더해 21대 국회 들어 대폭 쓰이기 시작했다.
국내에서 전자 발의로 제출된 첫 법안이 2019년 4월 26일 ‘선거제·검찰개혁 법안’이다. 당시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본청 220호 앞에 단체로 드러누워 패스트트랙 법안을 상정하기 위해 들어가려는 민주당 소속 의원들을 막았고, 민주당은 전자 발의로 이를 우회했다. 한 민주당 관계자는 “요즘은 전자 발의로 법안을 거의 다 내 다른 정당과는 교류 자체가 없다. 법안에 대한 정보는 상대 측의 적극적인 설명이 없으면 그냥 지나치는 편이다”라고 말했다.
● “갈등 아닌 화합 이끄는 ‘큰 정치인’ 필요”
전문가들은 경험과 역사를 다른 당과 공유하는 정치인들이 줄어들었다고 지적한다. 조동준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과거에는 국회의원들이 국회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이다가도 뒤에서는 ‘형 동생’ 했다. 지금은 서로 대화를 거의 안 하고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없고 미움이 크다”며 “정치인, 나아가 국민을 아우를 수 있는 공통분모가 사라졌다”고 말했다. 이준한 교수는 “지금 우리나라 정치엔 갈등을 중재할 ‘큰 정치인’이 없고 오히려 싸움을 일으키는 ‘작은 정치인’만 있다”고 지적했다.
국민 화합을 위해서라도 여야 간의 합의가 필수적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최창렬 용인대 정치학과 교수는 “여야의 합의로 법안이 만들어진다면 극단적인 지지층들을 누그러뜨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김형준 배재대 석좌교수는 “다음 총선에서는 단절된 국회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양극화 지수각 국회의원이 대표 발의한 법안에 다른 정당 소속 의원이 얼마나 서명해줬는지를 토대로 산출한 지표. 수치가 높을수록 타 정당과 공동 발의한 사례가 적었다는 뜻으로, 협치 수준이 낮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동아일보 취재팀과 엄기홍 경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전 한국정당학회장)가 인공지능(AI)을 활용해 분석했다.
손준영 기자 han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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