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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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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속살해·미수 사건 65%가 ‘방치된 정신질환자’ 범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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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심 판결 34건 중 22건

77%가 ‘심신미약’ 상태 인정

전문가 “호주선 약 안 먹으면 경찰 출동”

의사 순회방문 통해 환자 상담 서비스도

지난해 선고된 존속살해·미수 10건 중 6건 이상에서 피고인이 정신질환자로 진단받은 기록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정신질환에 대한 적절한 관리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범죄가 벌어진 것으로 분석된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등이 정신질환자 관리망을 손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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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세계일보가 2022년 1월부터 12월까지 열린 존속살해·미수 1심 판결문 34건을 분석한 결과, 피고인이 양극성 정동장애·조현병·지적장애 등 정신과 진료 이력이 있는 경우가 64.7%(22건)를 차지했다. 대부분 정신병원에서 퇴원 후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거나 오랜 기간 약을 복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범죄를 저질렀다.

피고인에게 정신질환이 있는 22건의 사례 중 77.3%(17건)에서 재판부는 피고인이 ‘심신미약’ 상태였다고 봤다. 범행 당시 사물을 변별하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미약해진 상태였다는 것이다. 이를 반영하듯, 22건 가운데 68.2%(15건)에서 범행에서 살아남은 부모나 피고인의 형제자매가 “처벌보단 치료가 필요하다”며 선처를 탄원하거나 처벌 불원 의사를 밝혔다.

이들 사건에서 공통점은 피고인이 ‘정신병원 입원’과 ‘정신과 약물 복용’에 강한 반감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지난해 5월 창원시에서는 정도가 심한 정신장애인이 처방받은 약을 오랜 시간 복용하지 않다가, 부친이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겠다”고 하자 피해망상이 발현돼 범행을 저지른 일도 있었다.

세계일보

판결문으로 살펴본 존속살해·미수 사건 가운데 존속살해·미수 사건 가운데 이전에 부모를 상대로 상해나 협박 범죄를 먼저 일으킨 경우도 적지 않았던 만큼 정부와 지자체의 선제적 관리가 필요하다. 지난해 경찰청이 내놓은 자료를 보면 존속상해·폭행·협박·감금 범죄 건수는 2019년 2806명, 2020년 2919명, 2021년 3468명으로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 1월 당시 만 15세였던 A군은 자신을 길러 준 부친을 흉기로 살해했다. 중학교를 중퇴한 A군은 가족 손에 붙들려 정신병원 입원 치료도 받은 심한 조현병 환자였다. 가족이 자기를 해치려 한다는 피해망상에 시달리던 그는 “정신과 약을 먹지 않으면 강제로 입원시키겠다”는 부친의 말에 집 바깥으로 도망가려고 했다. 이를 저지하자 A군은 들고 있던 흉기로 부친을 수차례 찔렀다.

같은 해 6월 서울 노원구에선 조현병을 앓던 남성이 83세의 모친을 살해했다. 이 남성은 정신병원을 들락거리다 입원 중이던 병원이 폐원되자 모친과 4년가량 함께 집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약을 먹으면 자기 상태가 악화한다는 망상에 빠진 그는 복용을 권하는 모친을 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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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인 부모들은 정신질환자 자녀를 전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서 변을 당했다. 정신병원 입원과 약물 복용 모두 보호자 개인이 도맡아야 하는 상황에서 정신질환자의 분노는 안타깝게도 자신을 돌봐 준 보호자를 향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범죄에 대해 국가가 정신질환자를 방치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정신과 병상 부족 문제도 있지만 부모가 고령이 돼도 정신질환 앓는 자녀를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상황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전진용 울산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한국에선 보호자가 있는 한 공권력이 정신병원 입원 관여에 소극적인 편”이라며 “학회 등에서 만난 서양 의사들은 정신질환자라고 하더라도 성인인데 왜 60·70대 부모가 병원에 와서 입원을 시켜야 하는지 의아해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러다 보니 환자는 가족만 아니었으면 입원을 안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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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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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교수는 정신질환자의 약물 복용이 보호자에게 달린 것 역시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가령 호주에선 정신질환자가 약을 먹지 않으면 경찰관과 간호사가 와서 조처하는데 한국에도 치료명령제와 같은 제도가 있지만 한계가 많다”며 “정신질환자에 대한 책임을 보호자에게 전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예전엔 보호자가 억지로 약을 먹이거나 음식에 정신과 약을 타서 복용시키는 일도 있었는데, 환자에게도 자기결정권이 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병에 대해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임시방편은 될 수 있어도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염건웅 유원대 경찰학부 교수는 “조현병 환자는 치료만 잘하면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고 말했다. 그는 “사법입원도 방법이 될 수 있지만, 복지 시스템과 연계가 필요하다”며 “해외의 경우 의사가 순회 방문을 하며 환자에게 약물 복용을 지도하고 상담 서비스를 제공해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곳도 있다”고 부연했다.

존속살해·미수 사건 피고인 가운데 정신질환자는 아니지만 부모로부터 가정폭력을 당하거나 조부모 손에 맡겨진 경우도 있어, 소외 아동을 향한 관심도 필요하다. 재작년 ‘대구 형제 조부모 살해 사건’이 그 예다. 염 교수는 “범죄학에선 가정폭력 피해자의 폭력성이 높다고 본다”며 “사회 문제로 곪기 이전에 이를 적절히 해소시킬 필요가 있다”고 당부했다. 또 “어릴 땐 힘이 없어서 폭력에 굴복하다 본인이 성인이 되고 부모가 노령이 됐을 때 과거의 악감정을 폭력으로 분출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윤준호 기자 sherp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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