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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7 (화)

생명정치, 한국정치의 송곳 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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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섭 생명운동가]
문명전환정치는 정권교체정치나 정치전환정치, 혹은 체제전환정치와 비교될 수 있다. 정권교체정치에 진리는 현 정권의 퇴출이다. 과거의 경험으로 볼 때, 그것은 또 한 번의 정권교체에 그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점에서 논외가 될 수밖에 없다. 정치전환정치는 정권이 아니라 정치를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 개의 거대정당 외에 다수의 공감을 얻고 있다. 정치전환을 주장하는 이들은 1987년 민주항쟁 이후 구축된 민주화세대와 비-민주화세대의 세대 구도, 영남과 호남의 지역 구도, 보수와 진보의 이념 구도에 의한 정치질서의 고착을 혁파해야 한다고 믿는다. 체제전환정치 역시 정치전환을 이야기하지만, 완전히 결이 다르다. 이는 급진적 진보정치의 논리로써 기후급변과 극단화된 불평등의 근본적인 원인을 자본주의로 보고 그 철폐를 지향한다.

2024년, 문명전환정치의 원년

문명전환정치 역시, '정치의 전환'을 고대한다. 체제전환정치의 문제의식에도 적지 않게 공감한다. 그러나 문명전환정치는 이들과 또 다르다. 문명전환정치는 생태적·사회적 파국의 근본 원인을 근대 서구문명으로 본다. 그리고, '독립적이고 이성적인 개인'을 전제로 하는 근대 정치체계에 의문을 제기한다(물론, 왕정의 철폐와 평화로운 정권교체는 근대정치의 엄청난 성취이다).

문명전환의 관점에서, 2024년 총선과 2026년 지방선거, 2027년 3월 대선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정치적 일정은 한국에서의 문명전환정치 출발점이다. 팬데믹과 기후재난,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에서의 참혹한 전쟁, 그리고 성큼 다가온 AI시대의 경험이 정치화되는 첫 번째 시기이기 때문이다. 향후 몇 년은 서구적 근대문명 이후의 정치를 실험하고 경험하는 최초의 시간이 될 수 있다. 문명전환 및 새로운 문명의 태동이 정치적 소통의 주제로 등장하고, 문명전환을 표방하는 정치결사체가 나타날 수도 있다. 인간 중심주의를 넘어 비-인간 존재의 정치를 제기하고, 근대적 원자적 민주주의를 넘어 깊은 마음의 민주주의를 주장할 수도 있다.

위기의 징후가 아니라 종말의 징후

'전쟁 같은 삶'은 단순히 수사에 그치지 않는다. 가속되는 전 지구적 기후재난과 유라시아와 중동에서의 살육과 전쟁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한다. 이는 체계의 자기파괴로서 종말의 신호이다. 서유럽과 일본 등 자본주의 선진국들의 제로성장 및 저성장과 트럼프 현상 및 정치적 무능력은 그 증거 중 하나일 뿐이다. 리셋(reset), '다시 개벽' 아니고서는 답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맥락에서 오늘날 전지구적으로 경험하는 기후급변과 극단적인 사회경제적 불평등, 정치체계의 무능력은 위기의 징후가 아니라, 종말의 징후이다. 위기는 체계의 '지속'이라는 관점에서 나온 개념이다. 종말은 기존 체계의 '한계'를 지시하는 말이다. 그렇다고 세상이 망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세계 그 자체는 소멸할 수 없다. 여기서 종말이란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면서, 동시에 새로운 질서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새로운 질서들은 지배적 지위를 향해 치열하게 경합 중이다. 그러므로 지금 필요한 것은 위기론이 아니라, 종말론이다.

(대한민국은 선진국이 되었다. 그런데 선진국이 되는 그 순간, 역설적으로 서유럽이 경험하는 정치체계 및 경제체계의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일부 일본 언론이 말하는 "대한민국은 지금 정점이고, 이제 내리막길밖에 없다"는 '피크 코리아(peak korea)'론은 매우 타당한 주장이다.)

그런 맥락에서 문명전환정치의 관점은 이를테면, 체제전환정치의 탈성장론(de-growth)과 명백하게 다르다. 선진 자본주의국가들은 이미 저성장-제로성장시대에 진입했다. 자본주의가 끝을 향해가고 있는 것이다. 일본만이 아니다. 단 미국만이 패권국가로서 예외적으로 성장 기조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이념적인 구호를 앞세운 '탈성장 체제전환론'이 아니라, '포스트성장(post-growth)'의 관점에서 성장시대 이후의 새로운 경제형식의 태동과 작동을 관찰하고 발달시켜야 할 때이다.

새 문명들의 태동과 생명-문명의 염원

그렇다면, 문명전환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역사를 통해 경험하듯이, 그것은 새로운 질서의 태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를 통한 '배치의 재-배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삶-사회-문명의 '변이'들에 주목해야 한다. 새로운 문명들은 이미 치열하게 경합하면서 동시에, 융합하고 있다. 디지털 기술과 AI-로봇은 그 무엇보다 강력한 변이들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선택지일 뿐이다. 이미 우리는 포스트 근대문명시대를 살고 있다. 새로운 문명들이 태동하고 있다(문명은 항상 문명들이다. 근대서구문명은 다만 지배적 문명이었을 뿐이다.).

우리가 관찰하는 하나의 문명적 변이가 생명-문명이다. 우리는 곳곳에서 생명을 중심가치로 하는 문명의 태동을 목격한다. 일본 재난영화들의 생명사상과 테크노-애니미즘, 라틴 아메리카의 부엔 비비르(Buen Vivir)와 다(多)-자연주의, 전 세계적인 샤머니즘 열풍 등이 그것들이다.

특히 일본이 주목된다. 복잡계이론에 '새로운 질서는 혼돈의 가장자리에서 생겨난다'라는 말이 있다. 이를테면, 기존 질서가 무너지는 현장에서 새로운 질서가 생겨난다는 말이다. 일본은 적절한 예가 되고 있다.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이란 다시 말하면, 새로운 문명의 싹이 트는 시간이다. 문명전환의 관점에서 일본의 재앙은 축복이 될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30년의 저성장, 제로성장은 성장시대 이후 삶·사회의 형식을 발명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후쿠시마 대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핵발전소 폭발사고와 같은 대재난은 일본사회의 탈-이념을 가속시키고, 생명 중심 사회들의 출현을 자극했다. 포스트 근대문명 사회의 미래를 일본의 지역사회와 애니메이션에서 발견한다.

한국에서도 '생명'을 키워드로 하는 문명의 변이들이 생겨나고 있다. 최고의 자살율과 최저의 출생율은 '생명 저항'의 징표다. "권력이 생명을 대상화할 때 생명은 레지스탕스가 된다." 생명이 기존의 사회적 체계를 견딜 수 없다면, 떠날 수밖에 없다. 종말하는 옛 사회의 틈새에서 새로운 사회를 발명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한살림과 인드라망생명공동체와 같은 전통적인 생명운동만이 아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의는 2022년 '생명문명'을 선언했다. MBN의 대표적인 간판 프로그램인 <나는 자연인이다>의 장기흥행도 예사롭지 않다. 9월 초 보은에서 열린 동방마녀축제와 11월 초 해남에서 열린 대동굿도 문명전환의 신호로 읽힌다. 전라북도는 2021년 이른바 '생태문명전환조례'를 통과시킨 바 있다. 개발의 논리 속 보여주기식 입법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이른바 '좋은' 일자리의 부재와 높은 진입장벽은 탈-정규직과 탈-직업을 강제한다. 이와 관련해 또 하나 의미심한 현상은 탈-사회화와 아나키적 은둔이다.

우리의 척도는 생명이다(기존의 유기체적 생명 개념을 재구성하기 위해 '생/명'이라는 기호를 사용할 수 있다.). 이때 생명은 인간생명이나 유기체적 생명에 머물지 않는다. 신체적이면서도 거룩한 '물질/비물적' 생명이며, 먹혀야 먹을 수 있는 역설의 생명이다. 또한 살아나고 살아지고 사라지는 순환의 생명이다. 명철한 이성의 생명이면서 동시에, 감응하는 정동의 생명이다. 아름다운 감성의 생명이면서 동시에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공허의 생명이다. 생명의 문명은 생명감(生命感)과 생명관의 급진적 전환을 전제한다.

살림정치2.0: 그늘을 정치화하기

오늘날 소통되고 있는 생명정치 개념은 푸코와 아감벤 등과 같은 유럽의 철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이들은 권력에 의한 인간생명의 훈육과 통제(푸코), 그리고 사회로부터의 배제(벌거벗은 생명, 아감벤)를 다루었다. 반면, 들뢰즈-가타리에 영향을 받은 자율주의와 정동이론의 생명정치(삶정치)는 인간생명 개념과 유기체 생명 개념을 넘어서 체계에 저항하는 생명의 잠재력에 주목한다. 권력의 생명정치에 맞서는 생명의 생명정치인 셈이다. 최근 신유물론의 생명정치는 인간 생명을 넘어서 인간 너머의 생명, 나아가 생명의 조건으로써 비-생명과의 관계에 주목하여, 사물정치(cosmopolitics)로 나아가고 있다.

우리의 생명정치는 자율주의와 정동이론의 생명정치론과 신유물론의 사물정치 개념을 참고하면서, 동아시아적이고 한국적인 생명 사유에 주목한다. 특히 1980년대 이후 김지하를 비롯한 한국 생명운동의 생명정치 담론에 유의하여, 살리고-죽이는 역설의 생명정치, 기쁨의 사건을 사회화하는 신명의 생명정치를 발명하고자 한다. 나아가 인간/비인간, 생명/비생명의 경계를 넘나드는 우주생명 정치로의 확장을 기대한다. 그리고, 이는 담대한 우주론과 새로운 인간관 및 문명론을 포함한 다시개벽정치로 연결된다.

우리는 인간/비인간, 생명/비생명이 활기차고 신명나게 어울릴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생산하는 생/명(生/命) 살림정치를 염원한다. 활생(活生)·활명(活命)의 세상을 꿈꾼다. 인간만의 공동체가 아닌, 비인간을 포함해 삶을 나누는 공생체로의 사회적 패러다임의 전환을 기대한다. 그리고 그것은 권력이라는 매체를 통해 역동적으로 소통되고 생산될 수 있다. 우리가 권력과 정치를 이야기하려는 이유이다. 탈성장사회가 아니라 포스트성장사회를 강조하고, 고양이당을 상상하고, 직업이 아닌 생업(生業)의 일자리 패러다임을 실험하는 이유이다. 직접민주주의와 함께 '깊은 민주주의(deep democracy)'를 논의하려는 이유이다. 개벽정치의 서사를 창안하려는 이유이다.

생명-살림정치에도 나름의 역사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12년전 살림정치가 선포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2011년 10월의 일이었다. 살림정치여성행동이 출범하였다. 그해 12월 서울시장 보궐선거와 이듬해 총선을 앞둔 상황이었다. 살림정치여성행동은 "민주주의와 성평등 그리고 생태 평화가 존중되는 생활정치, 살림정치의 가치가 실현되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살리는 정치, 돌보는 정치, 나누는 정치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살림정치의 가치를 확산하는 살림포럼 운영과 후보인증 사업, 시민정치운동사업 등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살림정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특정후보를 지지했고, 특정정당과 연계되면서 살림정치는 퇴색되었다. 그것은 시대적 한계이기도 했지만, 사상적 한계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인간 중심주의의 한계, 가치 중심정치의 한계였다. 결정적으로 섬세한 세계감(世界感)과 담대한 세계관(世界觀), 그리고 섬세하고도 담대하고 아름다운 세계상(世界像)의 부재라는 한계였다.

김지하의 '그늘'의 은유는 살림정치의 차원변화에 큰 영감을 준다. 2004년 김지하는 <생명과 평화의 길>이라는 단체를 창립하며, "그늘이 우주를 바꾼다"를 화두로 던진다. 우리는 그것을 "그늘이 문명을 바꾼다", "그늘이 정치를 바꾼다"로 다시 읽는다.

이를테면 생명정치는, 살림정치2.0은 '그늘의 정치'다. 그늘진 몸과 마음에 유의하는 정치다. 이때 그늘은 그림자와 구별된다. 그늘은 사각지대와 다르다. 비가시적인 것에 유의해야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정치는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것, 죽은 것, 죽음조자 부재한 것에 유의해야 한다. 살려내야 한다. 바이러스와 미생물과 균류들로부터 외계인과 우주의 암흑물질까지. 인적 없는 산중의 요양시설과 반지하의 세 모녀가 그들이다. 가자지구의 지하동굴이 그들이다. 그러나 그늘이 고통의 그것만은 아니다. 깨알 같은 즐거움과 가을 하늘 같은 티없는 평화의 순간도 있다.

인간과 사회와 우주의 신산고초(辛酸苦楚)와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어떻게 권력과 연결할 것인가? 어떻게 그늘을 정치화할 것인가? 어떻게 '흰 그늘'의 빛나는 신명(神命)의 순간을 정치화할 것인가?

어떻게 우리 자신을 정치적 사건으로 만들 것인가?

생명정치의 관점에서 2024년 총선의 전략적 목표는 기존의 정치적 구도, 특히 진보/보수, 좌파/우파의 구도를 흔들고 문명전환정치의 틈새를 만드는 것이다. 판을 흔들어 기존의 구도를 균열시키고, 새로운 가능성의 여백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환정치 연합이 불가피하다. 이미 정치전환을 내세우는 수많은 정당과 정파들이 기존의 정치질서에 대항하기 위해 이른바 제3지대를 명분으로 연대와 연합을 공공연하게 내세우고 있다. 생명정치도 여기에 함께 해야 할지도 모른다. 생명정치는 복수(複數)의 정치를 전제한다. 정치는 정치들이다. 수많은 전환정치들이 있다. 진보정치와 보수정치를 비롯해, 젠더정치, 노동정치, 녹색정치, 디지털정치 등 수많은 정치들이 경합하고 있다. 그러므로, 선택적으로 함께 할 수 있다. 기준은 좌/우의 구도에서 벗어나기, 진보/보수의 구도 흔들기이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좌파/우파 정치적 구도에서 자유로운 나라는 없다. 한국 역시 분단으로 인해 그 어느 나라보다 첨예한 좌파/우파의 구도 속에 존재한다. 참혹한 전쟁으로 인해 실존적 이념적 피해의식이 깊이 각인되어 크다. 그리하여, 지금껏 공산주의를 공산주의라고 부르지 못하고, 좌파를 좌파라고 호명하지 못했다. 이는 역설적으로 좌파/우파 구도를 넘어설 가능성을 증폭시킨다. 생명정치는 여기서 촉매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생명정치는 그들 사이에 차별성과 그에 걸맞은 세(勢)를 실질적으로 드러낼 수 있을까?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풀어 말하면, '주머니 속 송곳되기.' "재능이 아주 빼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남의 눈에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생명정치도 정치체계라는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연합이 필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문명전환정치는 정권교체정치와 정치전환정치와 다르고, 체제전환정치와도 구별된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합(合)만으로 차원변화를 이룰 수 없다. 생명정치가 문명전환정치를 선도하며 주머니 속 송곳이 되기를 기대한다. 기존의 평면적 구도를 뚫고 돌출하는 수직적 돌파의 힘을 보여주기를 고대한다. 그리고, 새로운 정치적 구도의 발명을 열망한다.

그것은 기후재난시대의 라이프라인(life-line)과 같은 실제적이면서도, 초월적 돌파의 힘을 가진 정동적이고 영성적인 격발이 되어야 할 것이다. 생명-미학적이고 정치적인 탁월한 기예(技藝)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머니 속 송곳 되기처럼, 우리는 스스로 정치체계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심금(心琴)을 울리는 만파식적(萬波息笛)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2024년 봄, 어떻게 우리 자신을 정치적 사건으로 만들 것인가?

프레시안

▲주요섭 생명운동가.




[주요섭 생명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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