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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연재] 연합뉴스 '특파원 시선'

[특파원 시선] 당신은 애국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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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국이 선별한 '애국자'만 선거 출마 가능한 홍콩…민주진영은 "엄청난 무력감"

연합뉴스

2019년 12월 홍콩 민주진영이 구의원 선거 압승 후 연 첫 대규모 집회 현장
[연합뉴스 자료사진]



(홍콩=연합뉴스) 윤고은 특파원 = 몇 년 전 방송된 로맨틱 드라마의 한 장면. 국군 해외 파병 부대에서 저녁 국기 하강 시간 애국가가 울려 퍼지자 사랑싸움을 벌이던 남녀 주인공이 멈춰 서서 국기에 경례를 한다.

노을이 질 때면 애국가와 함께 전 국민을 '동작 그만' 시켰던 1980년대의 어사무사한 풍경이 시대극도 아닌 세련된 현대극에서 난데없이 튀어나와 손발이 오그라들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굳이?" 혹은 "웬 건전가요?" 하고 넘기면 되는 일. 그도 싫으면 채널을 돌리면 그만이다.

매일 같이 가던 길 멈추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는다고 애국심을 의심받는 시대는 지났다. 애국심이 집체극으로 표현되는 것은 국가 대항전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런데 홍콩에서는 시계가 거꾸로 가는 듯하다. 도시 전체에서 '애국자' 찬가가 쉼 없이 흐른다.

'애국자'만이 선거에 출마할 수 있고 '애국자에 의한 통치'를 굳건히 실현해야 하며 '애국주의 교육법'을 성실히 이행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학교에서는 매일 오전 8시면 중국 국가(國歌)가 연주된다.

눈을 딴 데로 돌리거나 적당히 좀 하라고 했다가는 잘못하면 경찰에 잡혀갈 수도 있다.

홍콩은 2021년 선거법을 개정하면서 선거에 출마하려는 사람이 애국자인지 여부를 정부 관리나 경찰, 지역 사회 위원회 등이 결정하고 판단하도록 했다. 어떤 사람에게 애국심이 있는지를 이들이 가늠해 선거 출마 자격을 주도록 한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라면 일정 연령에 도달하고 전과 같은 특별한 결격 사유가 없다면 누구나 선거에 출마할 수 있다. 또 누가 나라를, 국회를, 시의회와 구의회를 이끌지는 유권자가 선택하도록 맡긴다. 후보자에 대한 검증은 언론과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치열하게 이뤄진다.

그러나 이제 홍콩의 유권자들이 받는 투표용지는 당국의 검열을 거친 것이다.

2020년 국가보안법 제정 후 언론은 무력화되고 시민단체는 거의 사라져 자율적 감시 기능이 붕괴한 상황에서 선거도 당국이 골라준 후보들로 치른다.

그 결과 홍콩은 행정수반인 행정장관 등을 뽑는 선거위원회를 비롯해 입법회(의회)와 구의회도 모두 '친중 진영'이라는 한가지 색깔로 채워지게 됐다. 범민주 진영은 당국의 '애국자' 심사를 통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홍콩 민주 진영은 다음 달 치러지는 풀뿌리 구의원 선거에 후보를 내려 도전했지만, 최근 마감된 후보 등록에 실패했다. 아무도 출마 자격을 얻지 못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홍콩은 지난달 중국이 제정한 '애국주의 교육법'의 홍보와 실행에 열심이다.

내년 1월 1일부터 시행되는 애국주의 교육법은 학교, 공직사회, 기업, 종교단체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애국 교육을 강화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홍콩과 마카오는 물론이고 대만에도 이 법이 적용된다고 중국은 못 박았다.

그러자 대만 총리(행정원장)는 "국민에게 애국심을 요구하는 국가는 통치를 잘하고 대중 신뢰에 부응하는 것으로 그러한 사랑을 얻어야 한다. 애국심을 입법화하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와 같다"고 꼬집었다.

화성 탐사를 하는 시대에 애국주의 교육법이라니,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하려는 것처럼 헛되고 불가능한 일이라는 비판이다.

앞서 홍콩 최대 야당인 민주당의 대표는 "우리 당 지원자들이 출마 자격을 얻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했었다. 자신들은 '애국자'라는 얘기다.

하지만 구의회 선거에 후보를 내지 못하자 그는 "엄청난 무력감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그런데 무력감을 느끼는 이가 그 하나뿐일까.

직전 홍콩 구의원 선거는 2019년 거센 반정부 시위 도중 치러지면서 높은 민주화 요구 속 역대 가장 높은 71.2%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그러나 선거법 개정 후 2021년 치러진 입법회 선거는 민주 진영 보이콧과 시민 무관심 속 역대 최저 투표율(30.2%)을 기록했다.

다음 달 10일 구의원 선거에 대한 홍콩 시민의 반응은 어떠할지 궁금하다.

prett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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