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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내가 누군가로부터 범죄 피해를 입었고, 가해자가 수사 끝에 형사 재판에 넘겨졌다. 피해 당사자는 나인데, 정작 나는 가해자가 어떤 범죄 사실로 어느 정도 기소가 됐는지조차 알 수 없다. 납득이 가시나요? 기사는 한 변호사로부터 받은 제보에서 시작됐습니다. <배관 타고 침입했는데…'스토킹 공소장' 열람 거부한 법원> 주거 침입, 스토킹 피해를 입은 여성 변호를 맡게 됐는데 가해 남성이 정확히 어떤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는지도 확인을 못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배관 타고 침입한 남성…'스토킹 공소장' 열람 거부한 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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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혼자 살던 20대 여성 A 씨는 집에서 수상한 흔적들을 발견했습니다. 집안 곳곳에 검은 발자국이 찍힌 걸 확인하고 급히 CCTV를 확인해 봤는데 영상에는 충격적인 모습이 담겨있었습니다. 바로 한 남성이 한밤 중에 건물 배관을 타고 기어 올라가 빌라 2층에 있던 자신의 집 안에 침입하는 모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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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은 다름 아닌 전 남자친구. 결국 이 남성은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재판이 시작된 후부터 피해자 A 씨의 험난한 여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스토킹 범죄 피해자의 경우, 국선 변호인이 지원되지 않아 재판 시작 단계에서야 가까스로 변호사를 선임했던 A 씨. 변호인으로서는 뒤늦게 선임돼 A 씨가 기억하는 것 외에는 사건의 내용을 전혀 알 수 없었다고 합니다. 검찰 단계에서 가해자가 정확히 어떤 혐의로 기소가 됐는지조차도 말입니다. (재판에 참석하면 내용을 대충은 파악할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형사 재판은 피고인이 당사자이다 보니 피해자 변호인 일정보다 피고인 변호인 일정에 우선해 기일이 잡혀 재판 참석마저도 녹록지 않았다는 게 A 씨 측 변호인 설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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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공소장 열람 신청을 한 A 씨 측 변호인. 그러나 재판부는 '불허가'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후 공소장 열람을 허가해 달라는 의견서도 추가로 제출했지만 2번째 신청도 거부됐습니다. 불허 결정의 이유도 알 수 없었습니다. 결국 사건 심리가 모두 종료되고 나서야 열람 허가가 떨어졌습니다. 재판부는 결심 공판 날에야 "혹시라도 A 씨를 증인으로 부르게 될까 봐, 증인으로 불렀을 때 증거 증명력을 높이기 위해서였다"며 불허 결정의 이유를 밝혔다고 합니다. 피해자를 오히려 보호하기 위한 차원이었다는 겁니다. 재판부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정작 피해자 측은 아직 분통을 터트리고 있습니다. 이미 재판은 끝나버렸는데 무슨 소용이냐는 거죠.
재판부 재량이라 판단 제각각…"피해자 재판 참여 기회 박탈"
피해자 입장에서 이런 정보가 왜 필요한 건지 궁금하실 수도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피해자가 형사 재판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기회가 실질적으로 박탈된다는 데 있습니다. 검찰의 공소 사실에 최소한 내가 신고했던 내용은 인정이 돼 포함됐는지, 만약 인정되지 않았다면 추가 증거를 제출하거나, 하다 못해 의견서라도 제출해서 대응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기회가 차단된다는 겁니다. A 씨 측 변호를 맡은 유승희 변호사는 "중요 범죄 사실에 대해선 수사 기관에서 어느 정도 충분히 수사했겠지만 성범죄의 경우 피고인이 범죄의 동기라든가, 서로의 관계에 대해 거짓말하는 경우들이 상당히 많다"며 "문제는 이런 진술들이 형량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건데 관련 기록에 대한 접근이 차단되면 피해자 입장에선 사실 관계를 바로잡을 기회도 박탈되게 되는 셈"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다 알려 달라는 건 아닙니다. 피해자 입장에서는 재판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이니, 허가를 못 해주겠다면 최소한 이유라도 충분히 말해 달란 겁니다. 현행법상 형사 사건 피해자는 공소장 등 소송 기록 열람을 법원에 신청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허가 여부는 재판부 재량이라 판단이 제각각이고 불복 수단도 없습니다. 부산 돌려차기 사건에서도 피해자가 1심 형사 재판 과정에서 수사나 재판 기록에 전혀 접근할 수 없어 논란이 됐었는데요. '불복할 수 없는 판단엔 판단의 이유를 명시할 필요도 없다'는 형사소송법상 규정에 근거해 불허 결정의 이유를 명시할 필요도 없습니다. 공소장이나 공판기록 열람 등사 기준이 재판부마다 다르고 일관적이지 못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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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현실적으로 피해자가 할 수 있는 건 공판 기록 확보를 위해 가해자에 대해 민사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방법뿐입니다.
'문서 송부 촉탁 제도'라는 걸 이용해서 기록을 확보하는 우회로를 쓰는 건데, 이 경우 가해자에게 피해자의 이름과 주소 등 개인정보가 노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민사소송법상 형사 사건 가해자라도 소송 당사자인 이상 이 소장을 송달받을 뿐 아니라 소송 기록을 열람하고 복사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큰 범죄 피해자들은 소송을 꺼리게 될 수밖에 없는데요. 부산 돌려차기 사건 피해자도 이런 방법을 활용했다가 가해자에게 자신의 주소 등이 노출됐다며 두려움을 호소한 바 있습니다.
일본은 재판 기록 '원칙적 허가'…"피해자는 가장 큰 이해관계자, 제도 개선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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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무조건적으로 공판 기록 열람 등사를 허용해줘야 한다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피해자는 형사 재판에서 증인의 역할도 하고 있는데, A 씨 사건 재판부 말처럼 자칫 이런 정보를 전부 확인해 줬다가 피해자의 기억이 무의식적으로 왜곡될 우려가 있고 유리한 방향으로 증언을 바꿀 가능성도 있는 게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전문가들 사이에선 가급적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도 피해자의 재판 참여권을 보장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읍니다. 국회입법조사처도 관련 보고서를 발간했는데요. 김광현 입법조사관은 보고서를 통해 "피해자는 가해자의 적정한 처벌에 가장 큰 이해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고 피해자에 대한 적절한 정보 제공은 헌법이 보장하는 재판 절차 진술권의 실효적 보장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며 공판기록 열람 등사 제도 개선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재판장 재량으로 허가하고 있는 공판 기록 열람 등사를 원칙적으로 모두 허용해 주되 예외적인 경우에 제한하는 방안이 대표적입니다. 실제로 일본의 경우 원래 우리나라처럼 법원이 인정하는 경우에만 열람 등사가 가능했지만, 법 개정을 통해 '원칙적 허가, 예외적 불허' 구조를 마련했습니다. 입법조사처는 또 불복 방안을 마련하고 불허 이유를 통보해 줄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개략적 이유라도 알려주는 게 재판부가 사건의 가장 큰 이해당사자인 피해자를 조금이라도 배려하는 방안이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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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형사재판 절차에서 피해자 참여권을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으면서 검찰에서는 최근 의미 있는 변화가 있었습니다. 지난 7월, 범죄 피해자의 재판 진술권 등을 보장하는 등 피해자의 재판 참여 권리를 확대하는 일련의 대책을 내놓은 겁니다. 살인, 강도, 성범죄 등 중대 범죄 피의자를 기소할 때는 검사가 필수적으로 대면이나 문자 메시지로 피해자의 재판 진술권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진술 의사를 확인해야 한다는 게 골자입니다. 대검찰청은 "한국 형사절차는 검사와 피고인이 중심이라, 피해자는 방청석에서 재판을 지켜보는 '주변인'으로만 머문다는 비판이 제기돼 왔다"며 "피해자가 형사절차의 '주인공'으로 적극 참여할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고 개선안 시행 배경을 밝혔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범죄 피해자의 공소장, 공판 기록 열람 관련 제도 개선은 사건의 '주변인'으로 철저히 배제되고 있는 피해자들을 위한 최소한의 권리일 겁니다. 피해를 입은 건 나인데 정작 내 사건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없다? 피해자 입장에선 분통 터질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자신이 당한 사건 정보에 대해 피해자가 갖는 절실함에 대해 법원이 조금 더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는 입법조사처의 제언처럼 법원 실무에서의 인식 변화, 그리고 제도 개선이 꼭 필요해 보입니다.
하정연 기자 h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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