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2023년 2월 한국일보의 세 번째 베트남 특파원으로 부임한 허경주 특파원이 ‘아세안 속으로’를 통해 혼자 알고 넘어가기 아까운 동남아시아 각국 사회·생활상을 소개합니다. 거리는 가깝지만 의외로 잘 몰랐던 아세안 10개국 이야기, 격주 금요일마다 함께하세요!5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도심이 미세먼지로 뿌옇게 흐려있다. 자카르타=서재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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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일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정상회의가 열린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공항에 도착해 전용기에서 내리는 각국 정상들만큼이나 눈길을 끈 것은 인도네시아의 잿빛 하늘이다. 햇빛 한 조각 찾기 힘든 희뿌연 하늘 탓에 도시는 마치 안갯속에 갇힌 것처럼 보인다. 대낮인데도 간신히 마천루의 형체만 알아볼 정도다. 그래도 며칠 새 그나마 나아진 것이라는 게 현지인들의 설명이다. 직장인 데비 탐부난은 한국일보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길을 걸으면 눈이 따갑고 얼굴에 먼지가 묻는 느낌이 들었는데, 지금은 양호한 편”이라고 말했다.
동남아 주요 도시, ‘최악 공기’ 톱 10 포진
아시아의 회색빛 하늘은 질식하는 지구를 상징한다. ‘최악의 공기질’로 악명 높은 도시 상당수가 아시아에 몰려 있다. 정상회의 참석자들이 속속 도착하던 5일 오전 10시(현지시간), 스위스에 본사를 둔 글로벌 대기질 분석업체 아이큐에어(IQAIR)는 자카르타의 공기질지수(AQI)가 162라고 밝혔다. 말레이시아 쿠칭(181)과 중국 베이징(178)에 이어 전 세계 도시 중 세 번째로 높은 수치인데, 바꿔 말하면 ‘대기오염 3위 도시’라는 의미다. 파키스탄 라호르(159)와 인도 뉴델리(154), 베트남 하노이(145)가 뒤를 이었다. 서울은 53이다.
AQI는 △좋음(0∼50) △보통(51∼100) △민감한 사람에게 해로움(101∼150) △건강에 해로움(151∼200) △매우 건강에 해로움(201∼300) △위험(301∼500) 등 6단계로 나뉜다. ‘해로움’ 수준의 도시들에선 인간의 생존에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활동인 호흡이 오히려 생명을 갉아먹는 일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시점에 따라 순위가 엎치락뒤치락하긴 해도 자카르타와 베이징, 하노이 등은 세계 100개 주요 지역 가운데 늘 ‘톱 10’에 포진해 있다. 눈에 띄는 점은 동남아시아 국가의 순위 상승이다. 오랜 기간 인도, 방글라데시 등 남아시아와 중국이 ‘세계의 검은 폐’로 여겨졌지만, 몇 해 전부터는 동남아 대도시들이 오명을 건네받는 분위기다.
화석연료, 화전... '원인'은 복합적
동남아를 숨 막히게 하는 건 무엇일까. 원인 하나를 콕 집어 말하긴 어렵다. ①노후 교통수단 및 교통 인프라 미비 ②선진국의 오염 산업 이전 ③무분별한 화전 농업 ④기후변화로 길어진 건기 등 각종 요인이 뒤섞여 있는 탓이다.
3일 베트남 하노이의 하늘이 대기오염으로 뿌옇다. 건기(11~4월)가 되면 오염도는 더욱 심해진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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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범’으로 꼽히는 건 역시 석탄 화력발전이다. 핀란드 청정에너지 연구센터(CREA)에 따르면 자카르타 반경 100㎞ 이내에만 화력발전소 16곳이 있다. 다른 나라 상황도 다르진 않다. 석탄 발전 비율이 각각 42%, 46%인 베트남과 말레이시아에서도 매일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경제 발전과 인구 증가, 도시화 등 영향으로 동남아 주요국의 전력 수요는 급격히 늘었는데, 신재생 에너지 전환에 속도를 내는 중국, 인도와 달리 친환경 발전 여력이 없어 화석연료에 의존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태국과 라오스 등의 경우, 화전 농업이 불러온 연무로 매년 초 골머리를 앓는다. 2, 3월 추수철이 끝나면 농민들이 다음 농사 준비를 위해 옥수수와 벼 부산물을 태우거나, 농경지를 늘리려 숲을 태우면서 엄청난 양의 재가 하늘을 뒤덮는다. 태국 북부 치앙마이는 올해 2월 공기질이 역대 최악 수준(AQI 212)으로 악화했다.
1일 베트남 하노이의 도로에 오토바이 수십 대가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대기오염이 심각한 탓에 코로나19가 끝나도 시민들은 마스크를 벗지 않는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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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 역동성의 상징인 오토바이 역시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자카르타에서는 위성 도시 주민까지 합해 약 3,000만 명이 오토바이를 타고 매일 출퇴근한다. ‘오토바이 천국’으로 불리는 베트남은 인구 9,900만 명에 등록 오토바이 수만 6,500만 대다. 한국 전체 인구보다도 많다. 모든 성인이 한 대씩 오토바이를 갖고 있는 셈이다.
교통 인프라가 부족한 데다 소득 수준도 높지 않다 보니, 자동차 대신 오토바이가 출퇴근은 물론 생업 수단으로 널리 활용된다. “애인은 없어도 오토바이가 없으면 안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만큼 매연도 많이 내뿜는다. 인도네시아 환경단체 KPBB의 아마드 사프루딘 전무는 “오토바이는 자동차보다 대기오염 물질을 4배나 더 많이 배출한다”고 지적했다.
5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시민들이 마스크를 쓴 채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자카르타=서재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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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방편 대신 근본 문제 해결해야”
정부가 손을 놓고 있는 건 아니다. 각국이 쏟아낸 대책은 눈물겹다. 아세안 정상회의를 앞두고 인도네시아는 자동차 홀짝제, 공무원 재택 근무, 학교 원격 수업 등 가능한 카드를 모두 꺼내들었다. 자카르타 주정부에선 인공 강우까지 시도했으나 여의치 않자 소방 대원들이 도심 고층 빌딩 옥상에서 물을 뿌려가며 대기질 개선에 안간힘을 쏟았다.
태국은 산불 진압용 항공기와 무인기(드론), 물대포 트럭까지 투입해 공중에서 물을 쏟아부었다. 도심에 초대형 공기청정기를 설치하기도 했다. 베트남은 2030년부터 개인의 오토바이 운행을 전면 금지하고 친환경 전기 오토바이 보급을 확대할 방침이다.
2019년 태국 방콕에서 소방관들이 미세먼지를 줄이기 위해 건물 옥상에 올라가 허공을 향해 물을 뿌리고 있다. 방콕=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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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노력’은 임시방편일 뿐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맑은 하늘을 되찾으려면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내놔야 한다는 말이다. 환경단체 ‘비차라 우다라’의 노비아 나탈리아 공동설립자는 “각국 정부는 석탄 화력발전소 같은 근원 오염원을 줄이는 방식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다만 지역 경제 성장을 견인하는 화석 연료 사용, ‘시민의 발’인 오토바이 탑승을 대안도 없이 무작정 막기도 쉽지 않다는 게 문제다.
시민들은 각자도생에 나선다. 코로나19가 사실상 종식됐어도, 자카르타나 하노이 시민들은 매연 탓에 마스크를 선뜻 벗지 못한다. 공기청정기 수요도 매년 늘어난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코트라) 호찌민 무역관 관계자는 “베트남 공기청정기 판매 대수는 연평균 3% 성장률을 보인다”며 “현지에서 대기오염 문제 인식이 높아지고 공기청정기 필요성이 커지면서 수요가 늘어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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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 글·사진 허경주 특파원 fairyhk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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