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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군부 통치·권력 세습… 거꾸로 가는 동남아 '민주화 시계' [아세안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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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위기의 민주주의

편집자주

2023년 2월 한국일보의 세 번째 베트남 특파원으로 부임한 허경주 특파원이 ‘아세안 속으로’를 통해 혼자 알고 넘어가기 아까운 동남아시아 각국 사회·생활상을 소개합니다. 거리는 가깝지만 의외로 잘 몰랐던 아세안 10개국 이야기, 격주 목요일마다 함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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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9일 태국 방콕에서 전진당 지지자들이 피타 림짜른랏 전진당 대표를 총리에서 낙마시킨 상하원 의원들을 향해 항의하고 있다. 이들이 들어 올린 세 손가락은 반군부 저항 운동의 상징이다. 방콕=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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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23일 저녁 태국 방콕 중심가. 폭우가 퍼붓는 궂은 날씨 속에 우비를 입은 시민 700여 명이 광장으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한 남성이 마이크를 잡고 외쳤다. “우리는 민주주의 원칙을 지지하기 위해 몇 달이라도 계속 싸울 것입니다.”

발언이 끝나기 무섭게 시민들은 휴대폰 플래시와 세 손가락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리며 환호했다. 누군가는 “피타(피타 림짜른랏 전진당 대표)”라고 외쳤고, 다른 누군가는 “내 투표를 존중하라”고 소리 질렀다.

한 달 넘게 곳곳에서 이 같은 시위가 이어지고 있는 태국 도심의 풍경이다. 적게는 수십 명, 많게는 수백 명이 모이는 등 시위 규모는 그때그때 다르지만 관통하는 주제는 하나다. 태국에 민주주의를 돌려놓으라는 것.

발단은 지난 5월 총선에서 국민들의 지지를 가장 많이 받은 하원 제1당 대표의 총리 도전 좌절이다. 총선 직후 야권 8개 정당의 연립정부 구성을 주도했던 전진당 피타 림짜른랏 대표는 군부가 장악한 상원과 하원 친군부 정당의 반대로 끝내 낙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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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3일 태국 방콕에서 열린 전진당 지지 시위 현장에서 시민 활동가 솜밧 분가마농이 마이크를 들고 발언하고 있다. 솜밧 분가마농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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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정부 구성 권한을 넘겨받은 하원 제2당(푸어타이당)이 의회의 총리 선출 투표 통과를 위해 군부 정당의 손을 덥석 잡으면서 태국 정치판은 ‘도로 군부’가 될 가능성마저 커졌다. 9년간의 군정을 끝내고 민주 진영 정부 출범을 기대했던 국민들이 거꾸로 가는 민주화에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게 최근 시위 물결이다.

지난달 23일 방콕 시위를 이끌었던 태국의 대표 시민 활동가 솜밧 분가마농은 한국일보에 “정부는 선거를 통해 표출된 민심을 따를 의무가 있다. 이것이 우리가 시위를 이어가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이어 “태국에서는 기본적인 정치 권리를 요구하는 집회조차 강한 탄압을 받는다. 그러나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 수준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솜밧 분가마농은 2014년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도 반대 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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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시민 쿤 기브 유칸트가 그린 지난달 23일 방콕 반군부 시위 현장 스케치. 솜밧 분가마농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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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울한 태국·캄보디아·미얀마


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태국과 좌우로 국경을 맞댄 미얀마와 캄보디아 상황은 더욱 암울하다. 캄보디아에선 38년간 군림한 ‘아시아의 스트롱맨’ 훈센 총리가 오는 22일 장남 훈마넷에게 총리직을 넘긴다. 명실상부한 ‘세습 독재 국가’가 되는 셈이다. 훈센의 막내아들과 조카사위도 새 내각 고위직을 맡을 예정이다.

권력 세습은 예고된 수순이었다. 지난달 총선에서 훈센 총리가 이끄는 집권 인민당은 의회 125석 중 120석을 꿰찼다. 나머지 5석도 친정부 정당 차지였다. 일찌감치 정적들을 제거하고 ‘무늬만 야당’을 대거 포진한 결과다. 정권 나팔수 역할을 하는 매체를 제외한 독립 언론은 살아남지 못했다. 표면상으로는 선거 절차를 거쳤지만 사실상 일당 독재 체제나 마찬가지다. 유엔이 캄보디아 민주주의 확립을 위해 1992~2020년 투표 시스템 구축 등에 206억 달러를 쏟아부었으나, 이런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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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1일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훈센 총리의 장남 훈마넷이 지지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훈마넷은 오는 22일 부친의 뒤를 이어 총리직에 오른다. 프놈펜=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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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에서는 쿠데타 군부 폭정이 2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민 아웅 흘라잉 최고사령관이 이끄는 군부는 민주주의 회복과 군부 정권 퇴진을 외치는 시민들을 잔혹하게 탄압하고 있다. 미얀마는 영국 이코노미스트 부설 경제분석기관인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이 올해 2월 발표한 ‘민주주의 지수’에서 167개국 중 166위를 기록했다. 최하위 아프가니스탄보다 한 계단 위다. 바로 위에는 북한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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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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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도 안 돼 무너진 민주화 '공든 탑'


몇 년 전만 해도 동남아 민주주의가 과거로 회귀할 것이라고 예상하긴 어려웠다. 1986년 코라손 아키노 전 필리핀 대통령이 이끈 피플 파워(People Power) 혁명, 1992년 태국 군부를 물러가게 한 5월 혁명을 거쳐 1998년 독재자 수하르토의 사임을 이끌어낸 인도네시아 시민 항쟁 등이 전개될 당시 아시아는 ‘민주주의 도미노 지역’으로 불렸다.

나라마다 다소 질곡이 있긴 했지만, 민주화 훈풍은 2000년대 들어서도 이어졌다. 2008년 말레이시아 총선에서는 야당이 돌풍을 일으키며 헌정 사상 처음으로 수십 년간 장기 집권해 왔던 여당을 무너뜨렸다. 2014년 인도네시아에도 군 경력 없는 최초의 민간인 후보 조코 위도도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첫 직선제 정권 교체를 이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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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미얀마 양곤에서 미얀마 민주화의 상징이자 야당 민주주의 민족동맹(NLD) 지도자였던 아웅산 수치가 총선 승리 후 카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양곤=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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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극적인 변화는 미얀마에서 일어났다. 2015년 미얀마 민주화 상징인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이 이끄는 민주주의 민족동맹(NLD)이 총선에서 승리하며 53년 만에 군부 독재를 끝내고 문민정부 시대를 활짝 연 것이다.

오랜 기간 쌓아 올린 ‘민주화의 공든 탑’은 왜 10년도 안 돼 무너져 내렸을까. 동남아 민주화 역주행 이면에는 중국의 부상이 있다는 게 대체적인 해석이다. 2017년 미국 우선주의와 고립주의를 표방했던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 등장과 함께 동남아 내에서 미국 영향력이 약화했고, 그 공백을 ‘차이나 머니’를 앞세운 중국이 메우면서 벌어진 현상이라는 얘기다.

파빈 차차발퐁푼 일본 교토대 동남아시아학과 교수는 미국 워싱턴포스트에 “베이징의 일대일로(一帶一路·육상 및 해상 실크로드) 전략과 무기, 기술 지원이 동남아 국가의 대중국 의존도를 높였다”며 “중국이 동남아 지역의 전반적 민주주의 쇠퇴에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짚었다. 중국 자본을 등에 업은 동남아 군부 정권들이 더 이상 서구와 국제사회의 경제 제재를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마이 웨이’를 이어간 결과, 민주주의에도 짙은 먹구름이 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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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훈센 총리의 아들인 훈마넷(오른쪽) 캄보디아 총리 지명자가 왕이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겸 외교부장과 악수하고 있다. 이날 양측은 지속적으로 상호 신뢰를 강화하고 우정을 나누겠다고 다짐했다. 프놈펜=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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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 허경주 특파원 fairyhk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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