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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료로부터 ‘뚱뚱하다’, ‘다이어트를 해야겠다’는 말을 듣고 참을 수 없어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했습니다.”
수도권의 한 의류 유통 중소기업에 다니던 이모 씨(29)는 1년여 동안 외모를 비하하고 자신의 직무가 아닌 일을 떠넘겨 괴롭혔다며 동료 2명을 고용노동부에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했다. 하지만 ‘지위나 관계의 우위를 이용했다’는 점이 인정되지 않아 괴롭힘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이 씨는 결국 올 초 퇴사한 뒤 심리 상담을 받고 있다.
#2. 서울의 한 정보기술(IT) 기업에서 일하는 강모 씨(59)는 지난해 오전 반차 휴가를 냈던 한 부하 직원에게 “오전에는 거래처들과 연락 업무가 많으니 반차 휴가는 오후에 쓰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가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당했다. 강 씨는 “고용부 조사 후 혐의를 벗긴 했지만 질책은 물론 업무상 조언을 하려다가도 위축되는 게 사실”이라고 했다.
2019년 7월 일명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근로기준법 개정안)’ 시행 이후 4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현장에선 직장 내 괴롭힘의 기준이 모호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이렇다 보니 4년 동안 접수된 사건 중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정된 건 13.2%에 불과했다. 강 씨처럼 과잉 신고를 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 10건 중 6건은 ‘위반 없음’이나 ‘취하’
고용부가 국민의힘 이주환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 후 지난달까지 처리된 신고 2만8495건 중 괴롭힘으로 인정된 경우는 3767건뿐인 것으로 나타났다. 검찰에 송치돼 기소까지 이어진 건 211건(0.7%)밖에 안 됐다. 나머지는 취하되거나(9576건, 33.6%) 법 위반 없음(7958건, 27.9%) 판정을 받았다.
인정 비율이 낮은 것은 ‘직장 내 괴롭힘’의 정의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법은 ‘사용자 또는 근로자가 직장 지위나 관계의 우위를 이용해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는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 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 규정했다.
신고 중에는 상사가 사무실에서 폭행을 했다는 등 누가 봐도 명백하게 규정에 해당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고용부 관계자는 “대부분은 지위나 관계의 우위가 뭔지, 업무상 적정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두고 양측의 입장이 첨예하게 갈리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 금전적 보상 노린 허위 신고도
직장 상사 등을 상대로 금전적 보상을 노리고 허위 신고를 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노동연구원이 올 1월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허위 신고자 85.4%가 피신고자에게 보상을 선요구한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의 한 디자인 중소기업 팀장 김모 씨(34)는 “한 직원이 ‘괴롭힘을 당해 정신과 치료를 받았으니 병원비를 보상해 달라’며 한 달째 무단결근을 하고 있어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직장 내 괴롭힘의 정의를 좀 더 명확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독일 등에선 법을 악용하거나 남용하는 걸 막기 위해 ‘반복적이며 구조적인 괴롭힘’을 처벌 대상으로 삼는다”며 “국내법에선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일회성 폭언까지 신고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우재원 노무사는 “법에 나오는 괴롭힘 기준이 너무 포괄적이다 보니 노무사들도 사건을 대할 때 혼란스러운 경우가 많다”며 “지금은 근로감독관들이 당사자를 조사해 판단하는데 고용부에서 좀 더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공표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고용부 관계자는 “법 관련 다양한 문제점을 인지하고 있고 개선을 모색할 예정”이라며 “인정 범위가 모호하다는 지적을 반영해 대응해 2021년 ‘직장 내 괴롭힘 판단 전문 위원회’를 설치했다. 앞으로 제도 등을 계속 보완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원영 기자 o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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