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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조용준의 시시콜콜] 피카소를 먼저 찬 유일한 여인 프랑스아즈 질로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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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피카소의 6번째 여인 프랑스아즈 질로(Françoise Gilot, 1921-2023)가 6월 6일 사망했다. 향년 101세.

피카소는 장기간 동거 및 결혼(두 번 했다)을 통해 모두 7명의 여인을 거쳤다. 물론 단기간의 애정 행각은 이루 헤아릴 수 없어서 얼마나 많은 여인을 지나쳤는지 알 수 없다.

프랑스아즈 질로는 피카소보다 무려 40년 연하였고, 소르본느 법대에 다니던 재원이었다. 이들은 9년간 동거했고, 아들 클로드와 딸 팔로마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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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1948년 프로방스 골프 주앙 해변에서의 피카소와 프랑스아즈 질로. 로버트 카파의 유명한 사진이다. 2023.06.10 digibobos@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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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로와의 동거는 오늘날 저 유명한 피카소 박물관을 낳는 동기가 되기도 했다.

피카소 미술관(박물관)은 대체 몇 군데나 있을까? 피카소 미술관은 파리, 앙티브, 발로리(이상 프랑스), 바르셀로나, 말라가(이상 스페인) 5군데에 있다. 이중 가장 기가 막힌 풍광을 자랑하는 곳은 프로방스 앙티브(Antibes)에 있는 미술관이다. 옛 성을 통째로 미술관으로 사용하는 이 곳은 원래 피카소가 프랑스와즈 질로와 밀애를 즐기러 내려와 사용했던 스튜디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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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앙티브 피카소 박물관 [조용준 사진] 2023.06.10 digibobos@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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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도라 마르와 동거하고 있던 와중에 무려 마흔 살이나 어린 스물 한 살의 질로를 만나서 홀딱 빠진 그는 도라 마르의 눈길을 피해 그림을 그린다는 핑계로 질로와 함께 프로방스의 앙티브에 새로운 밀애 장소를 꾸몄다.

1946년 프로방스로의 이전은 예술적으로 매우 중대한 변화를 의미한다. 피카소가 앙티브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파리에서의 '청색시대'는 끝이 났다. 그는 예전과 달리 매우 유희적인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는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미술관을 장식하기도 하는 것이다"라고 피카소는 격앙돼서 말하곤 했다. 그의 그림 《삶의 환희(La Joie de Vivre)》는 65세가 된 그 자신을 반영한다. 프랑스는 다시 자유로워졌고, 유럽은 2차대전의 상처를 치유하는 중이었으며, 예술가는 사랑에 빠져 있었다.

왜 작품 명이 《삶의 환희(La Joie de Vivre)》였겠는가. 62세의 늙은이가 22살의 풋풋한 여성과 애정 행각을 벌인다면 그 누구든 '삶의 환희'라고 외치지 않겠는가.

가리말디 궁전(Chateau Grimaldi)은 피카소가 일 년 여의 이곳 생활을 마치면서 자신의 작품 44점을 준 것이 계기가 되어 박물관으로 변모했다. 불륜의 장소가 박물관으로 바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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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앙티브 피카소 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피카소의 도자 작품들 [조용준 사진] 2023.06.10 digibobos@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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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티브의 피카소 박물관보다 아름다운 위치에 있는 아트 갤러리는 찾아보기 힘들다. 가리말디 궁전의 석탑 아래 테라스에서 당신은 해안부터 저 멀리 회색의 페라 곶(Cap Ferrat)까지 이르는 빛나는 바다를 볼 수 있다. 햇살은 수면을 두드리고 요트는 그 사이를 게으르게 지나쳐간다. 바다와 잇닿아 있는 성벽의 모퉁이에서는 아이들이 노를 저어 돌아다니고, 중세의 성벽 안에는 화랑의 벽화들이 위대한 예술가의 매우 유희적이고 별로 힘을 들이지 않은 듯한 작품들과 함께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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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앙티브 피카소 박물관 [조용준 사진] 2023.06.10 digibobos@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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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의 사랑에서 피카소는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었다. 여인들은 그의 욕정, 고독, 공허를 채워주는 존재로서 의미가 있을 뿐이었다. 그에게 사랑이란 다만 관능과 소유와 쾌락이었지, 희생이나 헌신은 전혀 아니었다. 게다가 피카소는 늘 한눈을 팔았다. 한 여인과 동거를 하면서도 계속 다른 여자들과 사랑을 나누었고, 밀회를 위한 밀실을 마련했다. 피카소 주변에는 그의 명성에 현혹된 여인들이 언제나 넘쳐났고, 그는 그러한 여인들과의 일시적인 쾌락에 기꺼이 몸을 던졌다.

피카소는 1943년 프랑스아즈 질로에게 "여성은 고통받는 존재다(Women are machines for suffering)"라고 말했다. 그들이 실제 9년 동안의 관계를 시작했을 때 61세의 이 예술가는 21세의 여학생(질로)에게 "내게 (여자는) 여신과 도어 매트(문간에 놓는 신발 바닥닦개) 두 종류 밖에 없다."라고 잔혹하게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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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질로와 피카소 2023.06.10 digibobos@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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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그에게 여자란 그림을 그리기 위한 단순한 오브제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몰랐다. 그의 그림에는 여인을 주제로 다룬 작품들이 넘쳐난다. 피카소가 23살에 파리의 빈민굴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 그의 첫 번째 여인인 동갑내기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시작으로 피카소의 마지막 여인 쟈클린 로크까지, 그는 새로운 연인을 만날 때마다 작품 경향이 변했다.

아니 어쩌면 매 순간 여인을 바꾸면서 자신의 창작 양식을 변화시킨 것일 수도 있다. 그 정도로 그의 예술 창작에서 여인은 매우 중요한 주제였다. 피카소가 평소 "행동은 모든 성공의 토대다."라고 강조한 것처럼, 그는 행위에 온 몸을 던지는 데 과감했다. 그는 움직임과 변화, 새로운 영역에의 도전, 예술가로서의 자신을 표현하는 새로운 방식의 시도를 사랑했다. 연애에 있어서도 그런 움직임을 적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고질화된 바람기는 그의 여인들에게 당연히 깊은 상처를 주었다. 피카소의 여인들은 그의 명성 뒤에 숨어 있는 변덕스러운 충동을 감내하며 오히려 메마름과 공허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 그랬어도 그 관계는 언제나 버림받는 것으로 끝났다.

오직 단 한 여자, 소르본느에서 철학을, 케임브리지에서 문학을 공부한데다, 로스쿨까지 다녀 매우 이성적이었던 질로만이 먼저 피카소를 버렸다.

질로는 1961년 1월 법적 소송을 통해 이 아이들이 피카소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정식으로 인정받았다. 이후 질로는 피카소에게 결혼에 대한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피카소의 여인 가운데 가장 똑똑한데다 법대를 나와 법적 사안에도 능란했던 질로에게 피카소는 항상 부담감을 갖고 있었고, 결혼까지 할 경우 그의 말년 인생이 매우 피곤해지겠다고 충분히 생각했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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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앙드레 빌레르가 찍은 클로드와 팔로마(1954) 2023.06.10 digibobos@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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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마흔 여섯 살이나 어린 쟈클린 로크(Jacqueline Roque, 1927-1986)와의 비밀결혼은 바로 이런 와중에 치러진 것이었다. 질로는 이 소식을 결혼식으로부터 12일이나 지나서 알게 되었고, 엄청난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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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피카소와 춤을 추는 쟈클린(1957년 칸느의 아틀리에). 더글라스 던컨의 사진이다. 2023.06.10 digibobos@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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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로가 1965년『피카소와 함께 한 세월』이란 자서전으로 9년 동거 생활의 경험을 통해 피카소의 '잔인한 학대'와 파렴치한 여성 편력에 대해 노골적으로 기록한 것도 이때의 배신감이 크게 작용했다고 보인다. 이 책의 출간으로 화가 난 피카소는 자신의 프라이버시에 대한 부당한 침해라며 판매금지 처분 신청을 냈으나 기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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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발로리 마도라 공장을 찾은 질로와 피카소. 피카소는 여기서도 새로운 여인에게 한 눈을 판다. 2023.06.10 digibobos@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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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4월 8일 피카소가 세상을 떠나고 장례식을 치르던 날은 4월의 프로방스 날씨치고는 매우 드물게 눈보라가 몰아쳤다. 그 장례식에 장남 파울로를 제외한 피카소의 다른 세 자식인 마야, 클로드와 팔로마, 그리고 파울로가 낳은 손자 파블리토(Pablito, 1948-1973)와 손녀 마리나(Marina, 1950-)는 모두 참석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쟈클린이 강경하게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근처 언덕 위 먼발치에서 장례식을 지켜봐야만 했다.

장례식 나흘 뒤 파블리토는 락스를 마셨다. 식도와 후두가 타버리고, 위가 파괴되고,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는 모습으로 피범벅 속에 누워 있는 오빠의 모습을 발견한 것은 마리나였다. 파블리토는 그로부터 90일이 지나 사망했다. 피카소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리 테레즈 역시 목을 매달았다.

장남 파울로 역시 약물 중독으로 사망했다. 종국에는 쟈클린 역시 1986년 피카소의 마드리드 전시회를 앞두고 권총 자살을 했다. 손녀 마리나는 14년 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은 이후 자신의 비참한 유년시절에 대한 책 『나의 할아버지, 피카소』를 출간했다.

프랑스아즈 질로는 그림에 대한 열망이 대단했고, 그 자신이 뛰어난 아티스트였다. 그러나 너무 오래 살았다. 그 모든 삶의 회한과 영욕이 뒤범벅이 된 그녀는 마지막 임종 순간에 어떤 기억을 떠올렸을까.

digibobos@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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